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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지나 기자 =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항소심에서 1심이 세웠던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 개입 권한이 없으니 직권남용도 성립할 수 없다'는 법리가 정면으로 뒤집혔다.
서울고법 형사14-1부(재판장 박혜선)는 지난달 30일 선고에서 형식상 직무집행의 모습을 띠고 이뤄진 재판 개입은 그 자체로 직권남용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직무권한이 없으면 무죄'라는 1심 뒤집다
1심은 사법행정권자의 권한을 '재판사무의 핵심영역'과 그 밖의 업무로 쪼갠 뒤, 핵심영역에 개입할 권한이 없으니 애초에 '일반적 직무권한'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없고, 결국 직권남용죄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였다.
2심은 이 프레임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일반적 직무권한은 '존재' 요건이고, 남용 여부는 그 권한을 어떻게 '행사'했는지의 문제인데, 1심은 위법한 결과에서 거꾸로 올라가 권한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위법·부당한 행위와 그 결과라는 권한 행사 측면의 요건을 직무권한의 존재 여부의 문제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라면서 권한의 유무와 행사 방식의 위법성을 분리해 판단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 '형식은 행정, 실질은 재판 개입'이라는 판단 기준
2심이 세운 기준은 명료하다. 사법행정권자가 국회·헌법재판소 등 대외관계 업무를 위해 법관에게 정보 제공이나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일반적 직무권한은 인정하되, 그 권한 행사가 구체 사건 재판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직권남용이 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행정협조 요청' 형식을 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재판의 결론·절차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라면 더 이상 정당한 권한 행사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특히 "재판의 공정성은 실제로 공정한가 못지않게, 공정하게 보이는 외관도 중요하다"며, 사법행정권자의 개입이 재판 당사자와 국민에게 '정치적·행정적 영향력에 흔들리는 재판'이라는 인상을 주었다면 그 자체로 법관의 재판권 행사를 현실적으로 방해한 결과라고 보았다. 비록 개입으로 판결 결론이 달라지지 않았더라도, 재판관여 행위가 공정성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초래했다면 권리행사방해 결과 요건은 충족된다는 해석이다.
◆ 한정위헌 취지 사건·통진당 항소심, 왜 유죄가 됐나
이 기준은 두 개의 핵심 사건에 그대로 적용됐다. 첫째는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 사건이다. 헌법재판소 관련 대외업무를 맡았던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이미 송달까지 끝난 '한정위헌 취지' 위헌제청결정을 직권취소하고 단순위헌 취지로 재결정해 달라며, 전산 검색에서 기존 결정문과 취소결정문을 빼는 방안까지 제안한 행위가 문제됐다.
항소심은 이를 "형식상 필요한 협조 요청처럼 보이지만, 실질은 개별 재판에 대한 개입이자 법관의 재판상 독립 침해"라고 규정하며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여기서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실장회의를 주재하며 "직권취소 및 재결정이 바람직하다"고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전제로 한 보고서 작성과 전산 검색 제외 방안까지 포함한 보고를 지시한 점이 공모의 근거로 인정됐다.

둘째는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지위확인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 개입 부분이다. 이 사건에서도 항소심은,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을 항소심 재판부에 전달하며 "1심과 달리 본안 판단을 통해 의원직 상실 여부를 법원이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를 설득한 행위를 직권남용으로 보았다. 특히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이 이동원 당시 재판장을 직접 만나 문건을 건네고 1심 판결의 문제점을 구두로 설명한 대목을 "객관적으로 다른 법관의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으로 규정했다.
2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통진당 1심 판결에 관한 문건을 보고받고, '항소심 재판부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설명자료를 전달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된 부분까지 사실상 승인한 것으로 보아 공모를 인정했다. 박병대 행정처장 역시 처장 주재 실장회의에서 이동원 재판장에게 문건과 법리를 전달하기로 논의한 점 등을 들어, 재판 개입 실행을 전제로 한 공모에 가담했다고 판단했다.
◆ "재판의 독립 훼손, 죄책 가볍지 않다"면서도 집행유예
항소심 재판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이규진·이민걸 등과 공모해 한정위헌 취지 사건과 통진당 항소심 재판에 개입, 염기창·이동원 재판장의 정당한 재판권 행사를 방해했다고 적시했다. "재판의 독립은 양보할 수 없는 헌법적 가치이고,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 없이는 법치주의가 유지되기 어렵다"며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양형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으로 비교적 가볍게 정리됐다. 개인적 금전 이익을 취한 사건이 아니고, 수십 건에 이르는 공소사실 중 유죄로 인정된 부분이 극히 일부인 점, 장기간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사회적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해 온 사정 등이 참작됐다. 항소심은 "무죄로 본 나머지 공소사실에 관해서도 피고인들이 이미 상당한 부담을 감수했다"는 점까지 감안해 형을 정했다고 밝혔다.
결국 이 판결은 "직권이 없으면 남용도 없다"는 형식논리를 걷어내고, 사법행정권의 외관을 빌려 재판에 손을 댄 행위를 유죄로 인정한 첫 고등법원 판결이라는 점에서, 향후 직권남용죄 판단과 재판 독립 논의의 중요한 기준점으로 남게 됐다.

abc123@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