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당 수출 규모 클수록, 환 헤지 수요 많아
[뉴스핌=한기진 기자] 지난 2013년 12월. 경남 창원에 있는 조선 기자재 업체 A사 재무담당 박 모 이사는 천당과 지옥을 맛봤다. 7월에 중국 기업과 체결한 300억원짜리 수출계약이 ‘수십억원 적자’ 계약이 될 뻔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엔저, 알몸의 기업들] 下 “환차익 생심(生心) 버리고 목표 환율을 설정하라”>
계약 당시 원/달러 환율은 1174원. 그런데 납품이 시작되고 수출대금이 입금되기 시작한 12월에 1060원대까지 급락해버린 것이다. 박 이사는 “회사 영업이익률이 10% 정도인데, 수백억원 수출계약 한방으로 영업이익을 다 날릴 뻔했다”고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A사는 손실을 전부 피했다. 수출 계약 즉시 주거래은행과 원화 환율 상승에 대비한 선물환 계약을 체결한 덕분이다. 박 이사는 “계약 단위당 거래 규모가 큰 기업은 100% 환 위험 헤지를 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어서 다행히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달러 환율이 최근 다시 오르고 있다. 6일에는 1070원에 근접했다. <사진=이형석 기자> |
◆ 소액 다계약 기업일수록 환 헤지 인식 부족
A 기업과 달리, 지옥을 경험한 기업들이 훨씬 많다. 일본에 파프리카를 수출하는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B 영농조합은 적자 수출 중이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100엔당 1106원이던 것이 최근에는 950원대로 급락하며 파프리카 값이 15%나 올라버렸다. 그렇다고 단가를 올리면 수출 물량이 줄어들까 가격을 올리지도 못한다.
환 헤지를 이용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지만, B 영농조합 관계자는 “소규모로 수출하고 계약 건수도 많은데 건별로 선물환 계약을 체결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면서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우리 같은 곳은 은행에서 환 헤지 계약을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파프리카를 올해 6월까지 1만3441톤을 수출해 지난해보다 910톤을 더 팔았는데도 수출금액은 4983만달러로 지난해보다 197만달러 감소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해 환차손을 보고 있다. 농수산물 수출 업종 전체가 엔저의 포탄을 맨몸으로 맞고 있다.
수출 중소・중견기업의 74%가 환위험 관리를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한국무역보험공사 조사(2014년 6월)가 있다.
◆ “엔화대출 갚겠다”는 분위기 확산
다만 위험한 환 투자는 크게 줄었다. 실례가 최근 엔화대출 추이다. 과거와 같으면 싼값에 엔화대출 수요가 늘었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오히려 갚으면서 엔화 대출 잔액이 줄고 있다.
IBK기업은행의 경우 지난해 3월 2295억엔에 달했던 엔화 대출 잔액은 같은 해 9월 1828억엔으로 떨어지더니 지난달 1427억엔까지 떨어졌다. KB국민은행도 올해 1월 661억엔에서 지난달 567억엔으로 떨어졌다. 우리은행은 지난 6월 617억엔을 기록한 이후 7월 602억엔, 8월 567억엔으로 감소했다. 하나은행의 경우 올해 1월 773억엔까지 달했던 엔화 대출 잔액이 꾸준히 감소해 지난 8월 632억엔까지 내려갔다. 2년 전보다 절반 수준이다.
기업은행 반월공단지점 관계자는 “엔화 대출했던 중소기업들은 상환 계획을 앞당겨 올해 갚으려는 곳과 앞으로 엔화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일단 원화로 갚은 뒤 나중에 엔화로 다시 갚으려는 곳 등으로 나뉘면서 요즘 엔화대출 상환 전략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농수산물 수출업종 등 수많은 업종이 환 헤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신용도가 낮아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어렵고 정부의 지원에서도 제외됐다.
금융권 외환 전문가들도 뚜렷한 조언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엔저 대책은 엔화 가치가 하락했을 때 일본산 시설재를 수입해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산 시설재를 수입하면 금융이나 세제상 지원을 해줄 계획이다.
그러나 현장 반응은 냉소적이다. 당장 필요도 없는 시설재를 싸다고 사서, 창고에 쌓아놓기만 하면 비용만 나가는 것인데 말이 안 되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행인 점은 산업 현장에서 환 위험에 대한 인식이 높다는 것이다. 과거 2006년, 2007년 엔화대출을 받았던 수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져 갔고, 키코(KIKO)의 충격은 아직 가시지 않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때문이다.
우리은행 외환사업부 관계자는 “과거보다 환 위험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높아졌고 출장 설명회 등도 기업 쪽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한기진 기자 (hkj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