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양진영 기자·사진=이형석 기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비 앤 불린과 16세기 영국 튜터가의 군주 헨리 8세의 이야기 '안나 볼레나'가 소프라노 박지현과 베이스 양석진의 하모니로 오페라 무대에서 펼쳐진다.
오는 11월 28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아시아 초연되는 오페라 '안나 볼레나'의 두 주연 배우를 만났다. '안나 볼레나'는 뉴스핌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오페라이자, 유럽과 뉴욕에서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는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소프라노 박지현과 베이스 양석진은 각각 주연인 앤 불린과 헨리 8세로 관객과 만난다. 오랜 유학 생활을 거친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실력으로는 정평이 난 전문가들에게 '안나 볼레나' 극 안팎의 이야기와 오페라 초심자를 위한 조언을 들어봤다.
"다른 음악도 아름답지만 오페라는 슬로우 푸드에 가까워요. 당장 입맛에 딱 붙는 건 아니지만 죽처럼 먹다 보면 다른 맛이 있고 빠지게 되는 매력이 있죠. '안나 볼레나'를 비롯해 오페라 장르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영감을 줬다고도 볼 수 있는 증거죠." (양석진)
'안나 볼레나'는 이탈리아 오페라 극작가 도니제티의 출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천일의 앤'과 '천일의 스캔들'로 영화화 되기도 했으며 아주 대중적인 스토리로 유명하다. 극중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로, 엘리자베스 공주(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뒤 아들을 얻지 못한 비운의 여성이었다. 헨리 8세는 후사를 위해 앤의 시녀 시모어와 결혼하려 앤을 불륜죄로 몰아 법정에 세우고, 이혼을 종용했다. 하지만 앤은 딸 엘리자베스의 지배권 상속을 위해 끝까지 이혼을 거부했고, 참수당하게 된다.
"국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초연이라고 들었어요. '안나 볼레나'는 사실 워낙 어려워서 다루지 않았던 작품이죠.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실화라고 하니 또 위대함이 느껴지고 의미가 새로웠죠.어렵기도 하지만 초연을 올리는 거라 아름다움이 더 느껴지기도 하고요. 원작은 3시간이 넘는 작품인데 대중을 위해 반복되는 부분들을 잘라내서 2시간 반 정도로 줄였어요. 극 자체가 굉장히 드라마틱하기에 누구도 졸지 않을 거고, 척척 극이 전개될 수록 즐거움을 느낄 거예요." (박지현)
"스토리 자체가 크게 회자될 수 있는 얘깃거리죠. 왜 아직까지 초연이 안됐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감명을 느꼈고요. 작품 자체가 배우들이 소화하기에도 힘든 부분이 있다더군요. 라벨라 이강호 단장님이 이런 걸 과감하게 시도하시는 게 대단하죠. 초연이라고 하면 사실 국립이나 시립에서도 부담스러워하거든요. 더군다나 사설에서는 힘든 일이고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라벨라 단장님 본인도 현역 성악가시라 스케일이 큰 편이죠." (양석진)
박지현과 양석진은 각각 남녀 주역을 맡았지만, 애석하게도 한 무대에서 호흡하지는 않는다. 첫 공연에서 앤 불린을 연기하는 박지현과 마지막 날인 둘째날 공연에서 헨리 8세로 등장하는 양석진. 두 사람이 나름대로 갖고 있는 캐릭터 해석과 함께 연습하며 서로에게 느낀 점을 들어봤다.
"사실 앤을 보여주기 위한 어떤 계획도 없어요. 나름대로의 한, 여자로서의 느낌과 공감을 그리려 하죠. 앤과 제 감정이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측은한 마음도 들었죠. 잘 하려는 욕심보다는 약간은 내려놓기도 했어요. 어떤 틀에 맞추기보다 인물 자체에 충실하게, 자연스럽게 부각시키고 싶어요. 사실 음악이든 연기든 다 초연이라 굉장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음악이 익숙하면 연기가 어렵지는 않아요.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 노력 중입니다." (박지현)
사실 헨리 8세는 여성편력에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실제로 역사적인 배경들을 봤더니 다분히 정치적인 고민들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바람둥이보다는 군주로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런 관계에 깃들어 있는 거죠. 그간 의도치 않게 코믹 작품들을 많이 했어요. 베이스인 제 파트 특징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번 작품은 제게도 큰 기회예요. 권위있는 정식 주역을 해보고 싶었어요. 당연히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요. 역할에 맞춰 걸음걸이부터 바꿨으니까요." (양석진)
최근 상당히 대중화된 뮤지컬과는 다른 오페라만의 특징을 묻자, 두 사람은 분명하게 '발성의 차이'를 꼽았다. 음향 장비가 없던 시대에 개발된 음악이라 오로지 100% 성악가의 발성에 기댄 음악과 극이라는 얘기. 또, 박지현과 양석진은 성악가 출신들이 가장 꿈꾸는 무대가 바로 오페라라는 점에서, 스스로 제1의 무대에 오르게 된 데에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오페라 배우예요. 성악을 공부할 때도 가장 고난도의 곡들은 오페라고요. 다들 오페라 배우가 되고 싶어하고 크고 작은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게 쉽지는 않아요. 실력이 있다 해도 그걸 검증받을 기회가 많이 없기도 하고, 신뢰를 주기도 어렵죠. 성악가로서 최고의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로 감사하며 살고 있죠." (양석진)
사실 클래식에 기반을 둔 오페라 음악과 장르적 특성상 그 인기와 파급력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는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두 사람은 "한번도 안본 사람이 어려워한다"고 편견을 깨뜨리는 한 마디를 했다. 그런 둘에게 베테랑으로서 초심자를 위한 오페라 추천을 부탁했다. 박지현, 양석진의 제안을 따라 올 겨울에는 탄산 음료같은 대중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말하자면 식혜같은 매력의 오페라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를 봐도 처음부터 어려운 철학 영화를 볼 수는 없죠. 오페라 부파라고 하는 코믹극을 먼저 접해보시길 추천해요. '라 보엠'이라든지, '라 트라비아타' 같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들로 천천히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보통 연말엔 갈라 콘서트 위주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번엔 어쩌면 '라 보엠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눈이 오는 배경이라 겨울과 아주 잘 어울리거든요." (양석진)
"처음이라 어렵다면, 유쾌한 극도 좋죠. 또 모르는 분들은 유명한 거나 많이 들었던 음악을 들으면 좀 덜 졸더라고요.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카르멘' 정도가 오케스트라 음악 자체도 익숙하고 쉽게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감성에 젖을 수 있는 선율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요. 저 같은 경우 이번 연말 베토벤 합창 교향곡, 송년 음악회, 신년 음악회를 통해서도 관객과 만날 것 같네요." (박지현)
"사실 제가 5년 정도의 한국 공백기가 있었어요. 제 모든 걸 쏟아낼 수 있는 최적의 시기에 앤을 만난 듯해요. 여자로서 제 속을 샅샅이 내보일 준비가 됐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간 제가 대접을 많이 받아왔던 소프라노였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지금 아프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안나 볼레나'란 대작을 초연으로 맡아서 참 감사한 맘이 따라요. 체력적으로 달리더라도 5년의 공백 가운데 이 대작을 만나 감개무량한 걸 말로 할 수 없고요.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제 손을 잡아주고 격려해주신 분들도 물론이고,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대학교 은사이신 조태희 교수님. 그분이 '너의 시련은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하셨고 어떻게 이 감사의 뜻을 표현할 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같은 게, 평생 하고 싶어하셨던 오페라가 '안나 볼레나'였어요. 제게 딱 맞는 역할이라고도 하셨죠. '안나 볼레나'에 저를 불러주신 이강호 단장님도 제게 유학시절부터 선배였고, 친정 오빠같은 분이에요. 모든 감사한 분들을 위해 저를 불사르고 싶네요." (박지현) "라벨라 오페라단 이강호 단장님이 과감하게 시도를 해주셔서 성악가들에게 너무 좋은 기회를 주셨죠. 사실 성악가로서, 또 오페라 무대에 데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요. 저만 해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는 자신 있었어요. 누구랑 붙어도 완전 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국에선 그걸 입증해줄 사람, 기회가 필요했죠. 그 자체가 정말 어려워요. 라벨라 오페라단의 작품을 많이 하게 되는 게 그런 저를 알아주고 쓰는 기회를 주셨으니 더 열심히 하게 돼요. 단장님이 제게 가장 은사님 같은 분이고요. 집도 절도 없는 저를 순수하게 능력 하나 보고 중용해 주셨고, 지금도 메인 타이틀 역을 맡기셨죠. 주신 배역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석진) |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 · 이형석 기자 (leeh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