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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톡] 고원희 "제 이름보다 작품 속 역할로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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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연배우 고원희가 3일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뉴스핌=글 황수정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연기하면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백화점에 가면 멸치를 봉지에 담아주시거나, 식당을 가면 서비스로 음료수를 주시기도 했어요.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참 감사했죠. 봉희로 살아가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6개월여 동안 '조봉희'로 살았던 배우 고원희(21). 그는 최근 종영한 KBS 2TV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연을 맡아 매일 아침 시청자들과 만났다. 첫 아침드라마였는데, 동시간대 1위를 놓치지 않으며 큰 사랑을 받았다. 8회 연장까지 하며 긴 대장정을 끝마치고 얼마 쉬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고원희는 밝은 미소와 에너지로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아침드라마는 밤을 세지 않아서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았어요. 아침 9시까지 출근하거나 밤 12시를 넘기지 않았어요. 회사원 출퇴근처럼 정말 규칙적이었죠. 다만 봉희의 삶이 너무 험난해서 그게 힘들었어요(웃음)"

고원희가 맡았던 '조봉희'는 정말 말 그대로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어린 시절 아빠가 죽어 한순간에 가장이 됐고,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던 중 친부모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친아빠가 바로 살인범이었던데다, 친엄마에게는 다른 사람이 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가정사 문제로 포기해야했고, 그 와중에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조봉희는 느리지만 강단있게 한 걸음씩 나아갔다.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연배우 고원희가 3일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살면서 한 두번 생길까 말까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캐릭터였어요. 너무 많은 상황들이 겹치다보니 '조봉희는 정말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죠. 첫 촬영 전날이 생일이었는데 아무도 안 만나고 집앞 카페에서 대본을 보며 공부했어요. 20회부터 등장하지만 촬영장에 미리 가서 선배님들 연기를 보며 공부했어요. 특히 극중 엄마로 나오신 김예령 선배님께 많이 도움을 받았어요. 진짜 엄마처럼 생각하며 연기할 때 많이 기댔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나온 부분들도 많아요"

고원희는 이번 드라마에서 김예령을 포함해 임호, 조은숙, 황금희, 윤주상, 이연경 등 쟁쟁한 선배 배우들과 함께 했다. 매번 소리치고 계략을 짜고 음해하고 시기하는 유독 '쎈' 캐릭터들이 많았다. 방송 중간 즈음에는 고원희가 아닌 조은숙, 황금희가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고원희는 "조합이 잘 어우러진 것"이라고 답했다.

"제가 주연이긴 했지만, 제가 돋보이고 이끌어 나가기보다 모든 사람들의 조합이 잘 맞았고 조화가 좋았기 때문에 드라마가 잘 됐다고 생각해요. 저도 상대배우를 믿고, 상대배우도 저를 믿고 연기를 했기 때문에 더 연기가 잘 된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도 선배님들이 연기를 너무 잘 해주셔서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죠. 오히려 제가 많이 기댔어요.(웃음)"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는 아침드라마계의 '내딸 금사월'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장 요소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고원희는 "친엄마로 나오셨던 황금희 선배님과 연기하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황금희가 연기한 박미순은 조봉희의 친엄마였으나 그가 딸임을 인지하지 못해 앞길을 방해하는가 하면 딸임을 알고나서도 앞에 나서지 못했다.

"미워하는 부분도 많고 내 친엄마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끌리는 부분도 있어야 하는데 그 두 가지를 표현하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주변에서는 왜 키워준 엄마에게만 살갑게 대하고 낳아준 엄마에게 못되게 구냐고 많이 뭐라고 했죠. 저는 낳아준 사람보다 키워준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딸을 버린게 아니라 뺏긴 거라서 더 복잡한 상황이었어요. 또 대본이 미리 나온게 아니라 예상할 수가 없어서 더 힘들었죠(웃음)"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연배우 고원희가 3일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고원희는 인터뷰 내내 주변 동료, 선배님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많이 기댔다"며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연기력 논란이 없었음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를 물어보자 고원희는 되려 "신기하다"고 놀라워했다. 이어 "주변에서 도움을 주면 잘 흡수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함께 드라마를 보지 못했어요. 부모님께서 너무 연기 지적을 많이 했거든요.(웃음) 저는 제가 잘한다기보다 사람들이 옆에서 도움을 주면 잘 흡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못하는 부분도 금방 개선되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더라고요. '꽃들의 전쟁' 때는 제가 봐도 눈에 띄게 연기가 달라지는게 보였어요. 매일 JTBC로 출근해 리딩 검사를 받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가 편해졌어요. 감독님이 원하는게 뭔지 알 것 같고, 다른 사람이 잘못된 게 눈에 보여 조언도 하게 됐죠. 그러다보니 제가 잘못 연기하고 있는 것도 보이니까 고치게 되는 거죠"

연기가 성장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고원희는 오히려 연기 욕심이 더 생겨난 듯 했다. 고원희는 아시아나 항공 최연소 모델로 먼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연기의 꿈이 있었다. 어린 시절 SM 오디션에 합격한 적도 있었고, 부모님의 권유로 중국 유학을 갔을 때도 연기자가 되고 싶어 1년만에 돌아와 버렸다. 데뷔 후 드라마 주조연을 떠나 시대극, 현대극을 가리지 않았고, 영화 역시 상업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다양한 분야로 스펙트럼 넓혔다. 지난해에는 tvN 'SNL코리아6'의 크루로 합류해 코믹 연기도 선보였다.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연배우 고원희가 3일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SNL코리아'도 도전했고, 이를 통해 순발력도 키웠고 다양한 역할을 하며 많이 배웠죠. 다만 대중들에게 '몸매'로 먼저 부각되는 부분은 아쉬웠어요.(웃음) 어떤 분야든, 어떤 매체든 연기는 같다고 생각해요. 광고로 먼저 데뷔했지만 광고 또한 연기라고 생각해요. 표정 연기도 연기니까요.(웃음) 쌓이고 쌓이면 저한테 더 좋은 밑거름이 되겠죠. 각각을 다르게 보지 않고 한가지 길이라고 생각해요. 기회가 되면 연극도 해보고 싶어요."

스타등용문으로 꼽힐 만큼 그동안 'TV소설'을 거쳐간 많은 배우들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조금 욕심을 내볼만 하건만 고원희는 그저 "제 이름이 아니라 작품 속 역할로 보여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소박한 소망을 전했다. 현재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인 고원희는 마지막으로 배우로서의 포부를 전했다.

"배역 욕심은 없어요. 조금만 나와도 '내가 이 작품을 같이 했어'라는 마음으로 연기를 하는 거죠. 연기 한계를 경험해볼 수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요.(웃음) 아직까지도 어떤 연기가 좋은 연기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부분에서 전도연 선배님이 제 롤모델이죠. 대체 불가 배우까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저를 봤을 때 제 이름보다 작품 속 역할로 보여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뉴스핌 Newspim]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  페이스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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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제6사 사장 김일성의 출현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이후부터 한동안 이 부대에 대한 동향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봄부터 갑자기 새로운 김일성(金日成)의 움직임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잡혔다. 신임 제6사 사장 역시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온 자였다. 그는 소련 지령으로 전임자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후임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9년 봄에 사(師)를 묶어서 방면군(方面軍)으로 편제를 변경하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1로군 제2방면군장(方面軍長)이 되었다. 소련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소련군 내 한국·중국인 군관들에게 유격 전술을 교육하여 파견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신임 제6사(제6사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2방면군이 된 부대) 사장으로 취임한 김일성(金日成)은 본명이 김일성(金一星)이다. 김성주 별호와 같다. 그는 1930년 5월 30일 간도 폭동 사건 때 용정에 있었던 한인이 다니는 대성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날 밤(1930년 5월 30일) 김일성(金一星)은 용정역 기관차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서울로 압송되기 전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소련으로 건너가 적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 지령에 따라 1938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파견돼 온 것이었다. [사진= AI 생성 이미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8년 4월 26일 밤 제2방면군은 평안북도 후창(厚昌) 경찰서 부흥(富興) 주재소 대안 임강현(臨江縣) 제3구(三區) 6도구(六道溝)를 습격하였다.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모두 개인화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경기관총 6정도 출동하였다. 총 5개 대(隊)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공격했다. 일본인 세무서원 2명, 중국인 세무서원 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지역 주민 50여 명을 납치해 갔다. 현금 2천 원, 식량 1만 원 상당을 탈취하였다. 이에 일본군과 만주군은 중일전쟁 후방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강도 높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군에 의한 토벌뿐만 아니라, 심리전, 교통 차단 등 다양한 봉쇄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1939년 봄이 되면 동북항일연군 제2·3로군의 전투력은 거의 소진돼 버렸다. 제2·3로군 중 전투력을 일부 보전한 부대는 소련으로 도주하거나, 소만 국경 지대로 은거했다. 전투력을 유지한 부대는 제1로군 뿐이었다. 이때 제1로군 사령관은 중국인 양정우(楊靖宇)였고, 부사령관은 중국인 위극민(魏極民), 사령관 비서처장 겸 군수처장은 앞서 설명한 한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총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제1로군은 동변도(東邊道)라 부르는 길림, 통화 간도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 이때 제3차 부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병력 손실이 큰 데다, 추가 병력 보충이 어려웠다. 그래서 기존의 로군 아래 군(軍)을 없애고 군(軍) 예하 모든 사(師)를 통합하여 제1·2·3방면군으로 바꾼 것이다. 제1방면군장은 조아범(曺亞範), 제2방면군장은 김일성(金日成), 제3방면군장은 진한장(陳翰章)이었다. 일본군과 만주군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1년 6개월간 더욱 강하게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양정우가 1940년 2월 23일 몽강현(濛江縣) 남쪽 490고지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린 채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 양정우가 죽자, 부사령관 위극민, 비서실장 겸 군수처장 오성륜,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등 11명의 동북항일연군 수뇌부는 1940년 3월 사령관 양정우 사후 문제를 논의했다. 첫째 군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병력 획득 공작을 벌인다. 둘째 소부대로 분산하여 가능하면 북상하여 제2·3로군과 합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때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10명 이하의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북상하도록 하면서 모두 '김일성 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성주가 속한 소부대도 '김일성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소련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과 만주군은 머리를 빗는 식의 섬멸 작전을 뜻하는 빗질 작전, 쇠파리처럼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쇠파리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제1로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이 1940년 4월 8일 부대 내 한중간 민족 대립으로 한인 부하로부터 암살당했다. 제3방면군장 진한장은 1940년 12월 8일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제1로군 사령관 비서실장 오성륜은 1941년 1월 30일 일본군에게 투항했다. 군 수뇌부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1941년 3월 말 기준 유기 시체 1282구, 투항 1040명, 체포 890명의 손실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여러 개의 소조직으로 재편하여 각자도생식(各自圖生式: 제각기 살길을 도모함)으로 도주하여 소련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소련으로 도주한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300명이었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제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제3로군 총사령 장수전(張壽錢),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문제의 김성주와 그의 처 김정숙(金靜淑)도 이들 무리에 끼어있었다. 1940년 11월이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6-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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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재룡, 강남서 사고 뒤 도주 [서울=뉴스핌] 김가희 기자 = 서울 강남에서 교통사고를 낸 뒤 현장을 떠난 배우 이재룡이 경찰 조사에서 음주운전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도로교통법 위반(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이씨를 조사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6일 오후 11시께 서울 강남구 청담역 인근 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혐의를 받는다. 이재룡. [사진=CJ E&M] 사고 이후 이씨는 차량을 자택에 주차한 뒤 지인의 집으로 이동했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실시한 음주 측정 결과 이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약물 간이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운전 당시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사고 당시 상황과 음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이씨는 과거에도 음주와 관련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03년 강남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음주 측정을 거부해 면허가 취소됐고, 2019년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남의 한 볼링장 입간판을 파손해 재물손괴 혐의로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rkgml925@newspim.com 2026-03-0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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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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