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전쟁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있다"
히로히토(裕仁) 전 덴노(天皇·일왕)이 생전에 측근에게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말을 했던 사실이 시종이었던 고바야시 시노부(小林忍)의 일기장을 통해 밝혀졌다고 도쿄신문과 아시히신문 등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1987년 4월 7일자 일기에 따르면 히로히토 전 덴노는 전날 밤 고바야시 시종에게 "일을 줄이고 가늘고 길게 살아도 의미가 없다. 고통스러운 것을 보고 듣는 일만 많아질 뿐이다"라며 "형제 등 가족들을 잃고 전쟁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당시 궁내청은 덴노의 부담 경감 대책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그해 2월엔 히로히토 전 덴노의 남동생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 친왕이 별세했다.
일기에 따르면 고바야시 시종은 "전쟁 책임은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얘기하는 것이지 국민 대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전후의 부흥과 지금의 발전을 본다면 (전쟁은) 이제 과거 역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오"라고 말해 그를 위로했다.
히로히토 전 덴노 [사진=로이터 뉴스핌] |
일기에는 히로히토 전 덴노가 어느 시기에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쟁책임을 지적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술돼 있지 않다.
하지만 1986년 3월 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 당시 공산당 의원이 중의원예산위원회에서 "무모한 전쟁을 시작해 일본을 파멸 직전까지 몰고간 사람은 누군가"라고 덴노의 전쟁책임을 물었고, 이를 부정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 당시 총리와 격렬한 논쟁을 벌어진 바 있다.
또한 1988년 2월에는 모토시마 히로시(本島等) 당시 나가사키(長崎) 시장이 "덴노의 전쟁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는 등 히로히토 전 덴노의 전쟁책임은 만년까지 여러차례 논쟁의 표적이 됐다.
그는 1987년 4월 29일 왕궁에서 진행된 생일 축하연에서 구토해 퇴장했다. 그해 9월 수술을 받아 일시 회복했지만 1988년 9월에 토혈한 후 재차 쓰러져 1989년 1월 7일 별세했다.
고바야시 시종은 시즈오카(静岡) 출신으로 인사원을 거쳐 1974년 4월 히로히토 전 덴노의 시종이 됐다. 히로히토 전 덴노의 부인인 고준(香淳)왕비의 측근으로도 불렸으며 2006년 7월 사망했다. 그는 시종이 된 후 2000년 고준왕비가 별세할 때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적었다.
아사히신문은 전문가를 인용해 "고바야시 시종은 겸손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라며 "덴노가 뜻하지 않게 넋두리를 흘린 게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일기에는 이 외에도 1980년 5월 27일 히로히토 전 덴노가 화궈평(華国鋒) 중국 당시 총리에게 중일전쟁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유감표명 계획은 궁내청 측근들이 우익들의 반대를 우려해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도쿄신문은 고바야시의 일기가 "(히로히토 전 덴노가) 만년까지 전쟁의 기억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었던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며 "귀중한 쇼와시대 후반사"라고 평했다.
1926년 즉위한 히로히토 전 덴노는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최종 승인한 인물이다. 패전 이후 쇼와 덴노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세계 각국에서 일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그를 처벌할 경우 일본 사회에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해 그를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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