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숙혜의 월가 이야기
[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 이른바 '볼커 룰'로 널리 알려진 폴 볼커 미 연방준비제도(Fed) 전 의장이 8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92세. 전립선 암으로 투병하던 볼턴 전 의장이 암의 전이와 합병증으로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
9일(현지시각) 주요 외신들은 1960년대부터 약 60년간 7명의 미국 전직 대통령과 재무 정책관으로, 연준 의장으로 호흡을 맞추며 미국 경제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볼커 전 의장의 일대기를 비중 있게 조명했다.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에 공식 회의 석상에서도 시가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애연가로 유명했던 볼커 전 의장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십 수 년간 재무부 고위 정책관으로 일하며 브레튼우즈 협정을 근간으로 세워진 전후 통화정책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어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를 거쳐 1979~1987년 연준 수장 자리를 맡은 그는 저성장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사투를 벌였다.
당시 22%에 달했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연준 위원들의 격렬한 반대를 꺾고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는 극단적인 통화정책을 동원했다.
연장 의장에 오른 지 불과 2개월 만에 예정에도 없던 토요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금리인상에 미국 사회는 경악했다.
과격한 금리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가 크게 확산됐고, 실제로 미국 기업부터 농가까지 꼬리를 무는 파산과 10% 선을 넘은 실업률 등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하강이 펼쳐졌다.
각 업계의 반발도 거셌다. 한파를 맞은 건축업계 경영자들은 통나무를 볼커 전 의장의 집무실로 배송, 강력한 항의의 뜻을 나타냈고 판매 부진에 홍역을 치렀던 자동차 업계에서는 자동차 키를 그에게 상자에 담아 그에게 배송했다.
성난 농민들은 트랙터와 농기계를 워싱턴D.C.의 연준 본부 앞으로 끌고 나와 거센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독불장군' 볼커 전 의장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에도 흔들림 없이 1982년까지 매파 정책을 고집했고, 이후 금리인하로 통화정책의 방향을 돌렸다.
이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던 2008년에도 그는 쓰러지는 금융시스템을 추스르기 위해 충격 요법을 동원했다.
대형 금융기관의 위험 거래를 전면 차단하는 '볼커 룰'을 앞세워 금융위기 진화 및 재발 방지에 팔을 걷은 것. 당시에도 그는 월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고, 최근 연준이 볼커 룰의 완화를 결정했을 때 제롬 파월 의장에게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과거 역대 대통령에게 눈덩이로 불어나는 미국의 재정 적자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던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종종 부정적인 평가를 제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반세기 이상 미국 재정과 통화정책 책임자로 수많은 위기 상황과 험로를 헤쳐나갔던 볼커 전 의장에 대해 월가는 미 경제와 금융업계에 초석을 세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뉴욕대학의 윌리엄 실버 이코노미스트는 워싱턴 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볼커 전 의장은 연준의 신뢰성을 재건한 인물"이라며 "향후 연준 의장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남겼다"고 말했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정치적인 비판을 무릎 쓰고 반드시 필요한 경제 정책을 밀어붙인 정책자"라며 볼커 전 의장을 회상한 바 있다.
윌리엄 풀 세인트루이스 연은 전 총재는 지난 2005년 칼럼에서 "그의 과격한 정책 행보와 결단력이 없었다면 미국 경제의 1980~1990년대 확장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higrac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