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심점 없는 재계…정부와의 소통 창구 부재로 곤혹
ESG 등 사회적 기업 강조해 온 최 회장, 직접 나설 듯
美 헤리티지 재단 형태의 한국형 싱크탱크 설립 유력
[편집자주] 한국형 헤리티지재단의 출현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재계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기업들의 목소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적 책임 등 우리 기업들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에 머리를 맞댈 단체의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재계를 대표하는 4대 그룹이 있습니다. 그중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역할은 단연 재계의 이목을 끕니다. 종합뉴스통신 뉴스핌이 '한국형 헤리티지' 출현의 가능성과 나아갈 방향, 과제를 짚어봤습니다.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지난 5일. 4대 그룹 총수들이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만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 9월 이후 2개월 만이다.
이날 회동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에 조문을 왔던 총수들에게 이재용 부회장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로 전해졌으나 실제 모임을 주선한 것은 최태원 회장으로 알려졌다.
자연스레 재계에서는 최 회장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구심점 역할을 상실하면서 재계의 목소리를 한데로 묶어 외부에 전달할 수 있는 경로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최태원 SK그룹 회장. 2020.10.23 sunup@newspim.com |
4대 그룹 회장들이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연이어 회동을 가진 것도 이러한 목마름이 반영된 결과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청와대나 경제단체가 주도해 재계 총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거나 개별적으로 친목 만남을 가지는 정도였지 4대 그룹 총수가 스스로 나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없었다. 누군가 나서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산적한 재계 현안을 헤쳐나가주길 바라는 시점에 최태원 회장이 나선 셈이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 말 경북 안동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기업도 이제는 사회의 일원으로 양성과 공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면서 "나 역시 기업인으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물론 기업에 주어진 새로운 책임과 역할을 적극 실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특정기업 대표가 아닌 기업인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강조한 것을 두고 사실상 출사표를 던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동안 그가 실제 경제단체 수장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분분했다. 과거 전경련과 같은 위상의 경제단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상의는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회원사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단체인데다 글로벌 네트워크 역시 과거 전경련과 비교할 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주로 노사관계 문제를 다뤄왔기 때문에 재계 여러 현안과 관련해 목소리를 내기에는 경험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최 회장이 재계 수장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최근 글로벌 경영 환경이 과거와 는 전혀 다른 국면에 돌입하면서 우리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벅찬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최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환경, 인권, 윤리, 노동 등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 기업을 상대로 한 요구사항이 점차 까다로워지고 있다.
미국에서 바이든 시대가 열리면서 친환경 등 '착한 경영' 기조가 전 세계적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아울러 중국의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일본의 수출 규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역학 구도의 변화와 그에 따른 각 국의 경제제재 역시 개별 기업들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변수다.
또 국내적으론 반기업 정서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공정경제 3법' 제·개정 움직임 등 산업계 현안과 관련해 재계가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재계가 주목하는 경제단체 모델로는 미국 헤리티지재단이 꼽힌다. 1973년 출범한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정책연구기관이다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재단으로 운영하면서 각 기업 간 친목 단체로 남아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 정부와의 교감도 어느 정도 이뤄진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2016년 김상조 당시 경제개혁연대 소장(현 청와대 정책실장) 역시 전경련과 한국경제연구원이 통합해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싱크탱크로 거듭나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권에 따르면 2018년 초 전경련이 사회공헌 및 기업연구소로 전환하는 방안을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제출했으나 청와대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 해 거절됐다.
4대 그룹 중심의 싱크탱크가 새롭게 탄생한다면 재계와 경제 정책을 조율해야 하는 당정청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재계 수장을 맡겠다는 결심을 이미 세운 것으로 본다"며 "다만 최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아 상의를 싱크탱크로 변모시킬지, 혹은 헤리티지 형태의 싱크탱크를 새롭게 만들 것인지는 현재로서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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