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수출 재개 협정은 전쟁 종식 '청신호' 아냐
러 전문가 "푸틴, 장기전이 유리하다고 생각"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6개월째 접어들었지만 끝날 기미가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 중재를 맡은 튀르키예(옛 국가명 '터키')와 유엔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흑해 곡물 수출을 재개하는 협상안에 서명하자 일각에서는 양국 간 전쟁이 정점에 치닫고 러시아가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협정 서명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약 12시간 후에 우크라 남부 오데사항을 공격했다.
처음에 러시아는 공격 사실을 부인했다가 오데사항의 우크라 군사시설을 정밀타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우크라에 따르면 러시아가 쏜 순항미사일 4발 중 2발은 오데사항 기반시설인 양수장을 조준했다. 우크라군이 나머지 2발을 격추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컸을 것이다.
25일(현지시간) CNN방송은 "러시아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진단했다. 곡물 수출 재개 합의로 러시아의 전쟁 셈법이 바뀔 것이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열린 흑해 곡물 수송 합의 서명식. [사진=로이터 뉴스핌] |
실제로 오데사항 공격이 있고 몇 시간 후 올렉시 곤자렌코 우크라 의원은 "러시아가 계속해서 세계 식량 안보를 위협하겠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주장했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말 한마디도 신뢰해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 곡물 수출 재개 협정은 러 특유의 '기만전술'
러시아의 오데사항 공격은 이전부터 휴전 협상을 중재해 온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와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만 행위라고 CNN은 분석했다.
이번 협정은 러시아가 세계 식량 안보를 위해서 우크라에 양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이번 곡물 수출 재개를 위해 러시아와 식량·비료 수출 제재의 일부 완화를 맞교환했다.
CNN은 애당초부터 러시아가 우크라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식량 안보 위기인데 러시아는 수출 재개를 무기로 제재 완화를 얻어냈다며 "사람들은 이를 갈취라고 한다"고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협정에는 튀르키예가 유엔과 함께 '공동조정센터'(JCC)를 마련해 러시아가 원활한 흑해 수출 약속을 지키는지 감시한다는 조항도 담겼지만 오데사항 공격으로 이는 계속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란 게 여실히 드러났다.
◆ 소모전에도 승리 굳게 믿는 푸틴..."앞으로 2년은 전쟁 끌고 갈 심산"
러-우크라 전쟁은 이제 '소모전'에 돌입했다고 보는 전문가들의 시각이 지배적이다. 러시아가 대부분의 동부 돈바스 지역과 남부 헤르손주(州), 자포리자를 손에 넣었지만 우크라는 현재 헤르손 탈환에 열중하고 있고 러시아는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어느 쪽도 우세하지 않은 전황이지만 푸틴 대통령의 생각은 다르다는 러시아 전문가의 견해가 나왔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CEIP)의 러 정치분석가 타티아나 스타노바야는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쓴 기고문에서 "푸틴 대통령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을 것"이라며 "크렘린궁 참모들이 계속해서 러시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한 그는 모든 군사작전 목표 달성을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화상으로 전략적개발·국가사업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2.07.18 [사진=로이터 뉴스핌] |
러시아의 이번 '특별군사작전' 목표란 우크라 친서방 정권의 교체다. 이는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 외무장관이 지난 24일 기자회견에서 노골적으로 말한 내용과 같다. 당시 그는 "우리는 우크라 동부 주민들을 돕고 완전히 용납할 수 없는 정권으로부터 해방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푸틴 대통령의 첫 번째 목표는 동부 돈바스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인데 "그는 시간이 러시아 편이라고 믿고 있다"고 스타노바야는 주장했다.
푸틴의 두 번째 목표는 수도 키이우의 항복을 얻어내는 일이다. 스타노바야는 "키이우가 '탈(脫)우크라'로 요약할 수 있는 러시아의 요구들을 수용할 것을 강제할 것이다. 짧게 말하면 우크라의 주권을 박탈하고 친서방 엘리트층을 제거해 정권을 (친러 성향으로) 교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푸틴 대통령이 잘못된 정보로 우크라 전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지만 조만간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라고 스타노바야는 말한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인데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실망감이 고조할 때 가장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서방국도 이러한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스타노바야는 조언했다.
푸틴 대통령은 비록 소모전이라할지라도 1~2년 전쟁을 끌면 서방의 무기 지원 중단 혹은 경제난 등으로 우크라가 먼저 지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 때가 되면 우크라 정부가 원하지 않아도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계산법이다.
이밖에 푸틴 대통령이 이번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지금 전쟁을 끝내면 남는 것은 서방의 제재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 뿐이고 푸틴 대통령의 정치 인생도 끝이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만 한다면 푸틴 대통령의 전략적 목표 달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세계 질서 재편"이라고 스타노바야 분석가는 말한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대통령과 같이 러시아에 친화적인 대통령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해 친러 동맹과 파트너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여기에는 지난 프랑스 대선 때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마린 르 펜 국민전선(FN) 당대표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차기 대권 도전도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 시치 부대 군인이 하르키우 최전선에서 러시아군 드론에 맞서 박격포를 발사하고 있다. 2022.07.25 [사진=로이터 뉴스핌] |
◆ "시간은 결코 러시아 편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 전문가인 피오나 힐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문은 "푸틴이 그렇게 믿고 싶을 뿐" 시간은 절대 러시아의 편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최근 비즈니스인사이더와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모두 장기적인 문제"라며 대규모 병력 손실과 군사 장비 부족을 꼽았다.
최근 전황 사진들을 보면 연식이 오래됐거나 폐품에 가까운 군사장비를 볼 수 있다며 "러시아가 잃은 군사장비를 짧은 시간 안에 보충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많다"고 힐 전 고문은 주장했다.
러군은 이미 수만명의 병력을 잃은 상태다. 이에 러시아가 교도소 입소자들까지 동원해 부족한 병력을 채우려 한다는 영국 국방부의 최신 정보도 나왔다.
힐 전 고문은 "푸틴은 시간이 러시아 편이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