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호 가뭄에 물 속 세월교 떠올라 마을을 잇고...낙강 청아한 물길 봄볕실어 나르고
[안동=뉴스핌] 남효선 기자 =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거닐던 도산서원 송림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 결이 한결 부드럽다. 봄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래도 솔 숲을 간지럽히는 건듯 부는 바람 결에 못내 아쉬운 듯 제법 칼칼한 겨울자락이 묻어 나온다.
[대구경북=남효선 기자] 2023.02.27 nulcheon@newspim.com |
도산서원 모롱이에서 건너다 보이는 시사단(試士壇) 앞으로 낯 선 풍경이 발길을 끈다.
푸릇한 싹이 돋아나는 의촌들 사이로 하현달을 닮은 완만한 곡선의 길이 강을 가로질러 마을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또렷한 모습으로 눈길을 잡는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던 안동 도산면 토계와 의인, 섬촌마을 잇는 세월교(洗越橋)가 오랜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지자 물 속에 잠겼던 길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물 속에 잠겼던 길이 물 위로 다시 떠오르자 가장 먼저 사람들의 발길이 세월교를 찾았다.
세월교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안동 토계와 의인, 섬촌마을을 잇기 위해 지난 2009년 만들어졌다. 이후 안동호에 물이 차면서 도산과 예안을 잇던 세월교가 물 속에 잠기면서 사람들은 길 대신 배를 이용해 드나들었다.
오랜 시간 물 속에 잠긴 채 사람들의 발걸음을 묻고 있던 세월교 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세월교 아래로 겨우내 얼었던 강이 풀리면서 봄을 풀어 놓는다.
멀리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해 봉화 석포 땅을 돌아 봉화 청량산을 품으며 안동 땅으로 들어선 낙동의 속살이 시리도록 맑다. 떼밀렸다가는 다시 모이여 여울을 만들고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강변을 어루만지는 봄 볕에 미처 풀리다 만 눈더미가 쌓여있다. 풀린 물길이 슬슬 다가가 얼어붙은 눈더미를 어루자 눈덩이가 맥없이 강물을 따라 흐른다.
가뭄으로 다시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 온 도산 세월교는 갈수기인 3~4개월 가량 마을과 마을을 잇다가 다시 안동호가 해갈이되면 물 속으로 잠기게될 터이다.
노송을 호위병처럼 거느린 시사단(試士壇)이 팔을 뻗으면 닿을 듯 창연하게 서 있다.
시사단은 조선조 1792년 3월, 정조대왕이 당시의 승정원좌부승지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해 도산별과를 신설하고 안동지역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조성한 특별 과거시험 현장이다.
1971년에 착공해 7년만인 1976년에 축조가 마무리된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까지 시사단은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위치했다.
안동댐에 물이 차기 전 1975년에 원래 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아올린 뒤 비각을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당시 이곳 시사단에서 치러진 도산별과는 특별시험으로 급제(及第) 2인, 진사 2인, 초시(初試)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했다.
1796년(정조 20)에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기 위해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현재의 비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것이다.
한 무리의 상춘객들이 세월교를 건너 시사단 돌계단으로 오른다.
안동 도산이 고향인듯한 중년의 사내가 함께 시사단에 오른 지인들에게 시사단에 서린 이야기를 전하며 안동댐으로 물에 잠긴 고향의 기억을 전한다.
시사단 너머 어느 부지런한 농부가 뿌려 놓은 호밀인듯 청보리인듯 파릇한 새싹을 밀어 올리고 있다. 흡사 연록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잘 가꿔진 축구장같다.
호밀밭을 낀 밭둑길 너머 아스라한 산 아래 마을이 그림처럼 떠 있다. 안동댐 건설 당시 용케도 수몰을 면한 마을들이다.
[대구경북=남효선 기자] 2023.02.27 nulcheon@newspim.com |
'모든 길은 마을로 통한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길은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면서 마을로 닿는다.
누 백년 모둠살이의 질서를 가꾸며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자손을 낳으며 이어 온 마을의 역동적인 역사가 댐 건설이라는 개발논리에 밀려 물 속에 묻힌 사람들의 흔적이 켜켜히 쌓인 모래톱으로 남아 물살에 떼밀리고 있다.
시사단에서 건너보이는 도산서원 마당 오래된 왕버들이 새 순을 뽑아 올리며 봄향을 퍼트리고 있다.
도산서원으로 오르는 길에 해맑은 얼굴의 남매가 두터운 외투 앞 단추를 열고 아빠와 엄마 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깡총거리며 내닫는다.
풀꽃을 찾아 나풀거리는 나비같다.
도산서원 마당을 지키고 서 있는 왕버들나무와 산수유, 매화가 막 봄을 영글고 있다. 며칠 지나야 봉우리가 벌여져 꽃을 열고 새잎을 틔울 모양새다.
'도를 향해 나아간다'는 '진도문(進道門)'으로 오르는 서원 정문의 초입에 서 있는 산수유가 지난 해 가을 영글었던 산수유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채 새 꽃봉우리를 총총이 달며 봄 기운을 퍼트리고 있다.
산수유 나무에서 '겨울과 봄의 경계'를 동시에 만난다.
새 봄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도산서원 마당에서 조금 조심스러워 진다. 경건한 품새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조 7)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도산)'이라는 편액(扁額)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 없어지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영남유림 정신사의 산실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제170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북 안동시 가송마을의 농암종택.[사진=농암종택홈페이지] 2023.02.27 nulcheon@newspim.com |
도산을 나와 낙동의 한 줄기인 명호천을 따라 퇴계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한 세상을 굽어보며 거닐던 가송마을의 '예던길'을 만난다.
농암이 퇴계보다 34세 연장이지만 두 유자(儒者)는 막역지교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농암은 '어부가'를 남긴 청백리로 이름 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강호문학'이라는 우리 문학사의 한 장르를 세운 문학가이다.
농암종택은 당초 분강마을에 있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지금의 '가송(佳松)'마을로 그대로 옮겨 자리잡았다.
명호천을 낀 예던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청량산에 봄 기운이 완연하다.
청량산이 잦아올린 봄 정기가 명호천 모래톱에 뿌리내린 갯버들에 수액을 부어 새 순을 피어올린다.
'버들강아지'이다. 깡총거리며 제 아빠와 엄마를 좇아 도산으로 오르던 아이들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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