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의결 제도, 헐값 면죄부 vs 신속·실질적 피해 구제
애플의 통신사 '갑질' 사건 동의의결 신청에 정치권 논란
공정위, '피해 구제' 중심에 놓고 제도 발전시켜 나갈 듯
[세종=뉴스핌] 김명은 기자 =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에 갑질한 혐의를 받는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의 동의의결안(자진시정안)을 기각하면서 동의의결 제도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동의의결 제도는 법 위반 혐의가 있는 사업자가 스스로 원상회복, 소비자 피해구제 등 시정방안을 제안하고 공정위가 이를 받아들이면 위법 여부를 가리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다. 지난 2021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됐다.
◆ 공정위, 브로드컴 동의의결안 '삼성전자 피해구제 미흡' 이유로 거부
공정위가 브로드컴 사건에서 피해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한 보상이 미흡하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동의의결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면서 앞으로 동의의결 제도 운영에도 일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브로드컴 [사진=로이터 뉴스핌] |
16일 관계기관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7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브로드컴의 거래상지위 남용 건과 관련한 최종 동의의결안을 기각했다. 공정위가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한 후에 동의의결안의 내용을 문제삼아 기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브로드컴은 구매 주문 승인 중단 등 불공정한 수단을 활용해 삼성전자가 스마트기기 부품을 3년간 연간 7억6000만달러 이상 자사로부터 구매하는 장기계약(LTA)을 체결하도록 강요한 혐의를 받는다.
공정위는 작년 1월 관련 조사를 마치고 심사보고서를 상정했으나 작년 7월 브로드컴의 신청에 따라 같은 해 8월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했다.
이후 브로드컴과 협의를 거쳐 올해 1월 잠정 동의의결안을 마련했으나 전원회의에서는 이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피해 구제가 미흡하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앞서 브로드컴의 잠정 동의의결안이 나왔을 때 피해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 없이 특정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었다.
◆ 동의의결 제도 본래 취지에 맞게 '피해 구제'에 방점 찍힐 듯
동의의결 제도는 '헐값 면죄부'와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 구제'라는 상반된 평가를 얻고 있다.
지난 2019년 7월 국내 이동통신사에 광고와 무상수리 비용을 떠넘기는 등 갑질을 한 혐의로 공정위 심의를 받던 애플코리아(애플)가 동의의결을 신청하자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빚어졌다.
당시 애플은 1000억원 규모의 상생지원안을 제시했다.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광고업계 추정을 근거로 애플이 2009년부터 통신사에 전가한 광고비가 1800억~2700억원에 달한다며 동의의결안 금액 규모가 터무니 없이 작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기업에 헐값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사진=뉴스핌 DB] 2021.11.12 jsh@newspim.com |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징금 위주의 공정위 제재 시스템에 한계가 있다며 동의의결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과징금은 걷어봐야 국가 재정으로 쓰일 뿐, 직접적인 피해자 구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과징금 불복소송에서 공정위가 패하면 처분 실익이 사라지며, 그 사이 대형 로펌들 배만 불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수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애플의 동의의결안에 따라 운영되는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 수료식에 참석해 "동의의결은 처벌 중심의 기존 시정조치 한계를 보완하고, 보다 적극적인 시정방안을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역동적인 시장 경쟁과 공정한 거래질서가 확립되도록 하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시장의 변화가 빠른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동의의결 제도의 활용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번 브로드컴 사례에서 보듯 앞으로는 '피해 구제' 쪽에 보다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동의의결안 협상 과정에서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야 해 공정위 심사관이 수동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전원회의에서 (피해 구제 방안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기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심사관 협상력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공정위가 조사하거나 심의 중인 사건의 당사자가 시간끌기를 통해 제재를 피하는 이른바 '꼼수 동의의결'를 막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를 통과했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해 통과된 개정법은 동의의결 절차가 진행 중인 동안에는 본 사건의 처분시효(일종의 공소시효)가 정지되도록 했다. 동의의결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를 악용하는 사례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dream78@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