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머핀 서울, 하이디 부허 '란사로테' 전시
생애 마지막 10년 '란사로테'서 작업한 문 스키닝 작품 소개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스위스 출신 여성주의 작가 하이디 부허(1982~1993)가 생애 마지막 10년,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 란사로테에서 보내며 작업한 문 '스키닝(skinning)' 작품을 리만머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다.
리만머핀 서울은 오는 8월19일까지 하이디 부허의 국내 두번째 개인전 '란사로테'를 개최한다. 하이디 부허의 국내 전시는 올해 3월 아트선재에서 아시아 첫 전시 '공간은 피막, 피부(Heidi Bucher: Spaces are Shells, are Skins)'에서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작품이 주로 소개됐다면, 이번 리만머핀에서는 그가 마주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민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고안안 상징적인 문 '스키닝' 작업을 엄선해 선보인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 The Estate of Heidi Buch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사진=리만머핀] 2023.07.06 89hklee@newspim.com |
하이디 부허는 건축 요소의 물리적 구조와 인체의 유사성을 밝히는 라텍스 캐스팅(본을 뜨는) 작업에 주력했다. 그의 작업은 주물을 뜰 구조면에 거즈천을 덮고 액체형의 라텍스를 발라 벗겨내는 '스키닝' 작업으로 은유된다. 마치 낡은 '피부'를 벗겨 내고 오랜 장소를 뒤로 하는 부허의 사적 '허물벗기' 과정이다. 이 행위는 동시에 특정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개인의 역사와 문화사를 개념한다.
작가는 라텍스가 건조되면 마치 살갗같은 색상, 질감 및 유연성을 띠게 된다는 점을 이용해 원래 대상의 형태 및 질감을 보존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아버지의 서재 의자를 스키닝한 'Herrenzimmer'은 스위스의 젠더 불평등 상황을 상징한 작품이다. 스위스는 1971년이 돼서야 여성이 참정권을 얻을 정도로 남녀를 향한 사회적 지위와 잣대는 달랐다. 'Herrenzimmer'는 한국어로 '신사들의 서재'다. 공간마저도 젠더로 분리될 정도였다.
하이디 부허는 1980년대 초반까지 사적이고 젠더화된 공간에 집중했다면 그 이후부터는 란사로테에서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며 호텔과 아트리서치센터 등 공적인 공간에 관심을 가졌다. 란사로테는 최근에는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20세기에는 많은 예술인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통했다. 건조한 화산암 풍경 위에 펼쳐진 파란색과 하얀색 건축물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사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문 스키닝 작업하는 하이디 부허, Winterthur, Switzerland, 1978 © The Estate of Heidi Buch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Photo by Hans Peter Siffert. [사진=리만머핀] 2023.07.06 89hklee@newspim.com |
하이디 부허가 문 스키닝한 작업을 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리만 머핀 관계자는 작가가 암 투병을하면서 마주하게 될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면서 기존 작업에서 탈바꿈한 것으로 해석했다.
작가는 란사로테의 시골집에 '팔라시오 이코'라는 이름을 붙여 수도와 전기가 단절되는 상황에서도 그곳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팔라시오 이코는 그 시기 스키닝 작업의 주요 대상이 됐다. 부허는 건물의 각종 문에 특히 이끌렸는데 녹청이 생긴 양쪽 문 표면에는 내부 목재 질감이 간헐적으로 노출됐고 산화로 인한 다양한 음영 청록색은 신비로운 빛깔을 띠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Untitled (Puerta del Palacio Ico), 1986 latex and cotton on canvas 109.06 x 74.02 inches 277 x 188 cm © The Estate of Heidi Bucher.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사진=리만머핀] 2023.07.06 89hklee@newspim.com |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부허가 아버지의 서재 의자를 스키닝한 'Herrenzimmer'. 'Herrenzimmer'은 서재. 한국어로 '신사들의 공간'이라는 뜻'. 서재가 젠더화된 공간이었던 스위스의 19세기 상황을 보여줌. 2023.07.06 89hklee@newspim.com |
부허의 '무제(필라시오 이코의 문)'(1986)은 뚜렷한 녹청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나무결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라텍스가 굳을 때 녹이 슬어 부서진 잔해와 페인트가 라텍스에 달라붙은 흔적이다. 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암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시간이 같이 익어가고 있다.
부허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공공 및 사립 기관에 소장돼 있다. 대표 소장처로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세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프랑스 파리 및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카디스트 예술재단, 로스앤젤레스의 해머 미술관, 스위스 브베 제니쉬 미술관, 빈터투어 미술관, 취리히의 미그로스 현대미술관, 런던 바를루도비츠 컬렉션, 이스라엔 박물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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