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이 메마른 시대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감성은 일종의 해방구와 같다. 시와 노래 사이에 숨어있는 감성의 촉수를 꺼내서 독자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시리즈물을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날씨를 느끼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과 가수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문화에세이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붉은 동백꽃이 흰 눈 위에 떨어진 풍경을 본 일이 있는가? 누군가가 낭자한 선혈(鮮血)을 남기고 떠난 자리 같기도 하고, 하얀 침대 시트 위에 꽃을 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처연한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래서인가. 시인들은 동백꽃이 피고 질 때면 좀처럼 붓을 내려놓지 못한다. 동백꽃을 소재로한 시가 많은 이유다.
동백꽃은 겨울부터 봄까지 피고 진다. 제주도 서귀포 남원읍 위미리의 동백 군락지부터 통영 장사도의 해상공원, 거제 지심도, 여수 오동도 등 동백꽃 명소가 많다. 또 강진의 백련사와 고창 선운사도 동백꽃으로 유명하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한 송이 동백꽃이 외롭게 피어 있다. [사진제공 = 여행작가 유성문] 2024.01.17 oks34@newspim.com |
동백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시인들의 감성과 만나보자. 오세영은 그의 시 '동백꽃'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강설로 하얗게 얼어붙은 숲 속에/ 누가 지폈나/ 빨갛게 달아오른 한 떨기 숯불/ 사람들은 한갓 동백이라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가녀린 꽃이라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추위를 막아주는 겨울 산의 화롯불(이하 생략)'.
시인이자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낸 도종환은 '동백 피는 날'에서 동백과 진눈깨비가 어우러지는 풍광을 노래한다.
'허공에 진눈깨비 치는 날에도/ 동백꽃 붉게 피어 아름답구나/ 눈비 오는 저 하늘에 길이 없어도/ 길을 내어 돌아오는 새들 있으리니/ 살아생전 뜻한 일 못다 이루고/ 그대 앞길 눈보라 가득하여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가시라/ 다시 올 꽃 한 송이 품어 가시라'
그래도 동백꽃의 절창은 미당 서정주를 빼놓을 수 없다. 노래로도 만들어진 그의 시 '선운사 동구'는 수십 년 전 쓰여졌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없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어디선가 육자배기 가락이 들리는 듯하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떨어진 동백꽃. [사진제공 = 유성문 여행작가] 2024.01.17 oks34@newspim.com |
절 뒷마당 어디쯤 뚝뚝 꺾여 떨어진 선홍빛 동백꽃,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하다. 송창식은 그 아름다움을 노래로 만들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1986년 발표된 이 노래는 미당 서정주가 쓴 '선운사 동구'에 대한 헌사이다. 송창식은 '참새의 하루' '담배가게 아가씨' 등과 함께 이 노래를 발표하며 선운사 동백의 낙화를 보며 느꼈던 처연함을 노래에 담았다고 술회했다. 송창식은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문학의 밤 강연자로 온 서정주를 처음 봤다. '오랜 시간 쌓인 감정의 조각들이 모여 한 편의 시가 된다'는 말을 듣고 감명 받았다.
두 사람이 만난 건 1975년이었다. 송창식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난 서정주의 제자 문정희 시인을 졸라 서울 사당동 미당의 자택을 방문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미당은 넌지시 '푸르른 날'을 노래로 만들어 보라며 내줬다. 좀체 자신의 시를 노랫말로 준 적 없는 미당이었기에 송창식은 정성을 다해 곡을 썼다. 그 노래를 맨 처음 들려주자 미당은 대만족했고, 그 뒤부터는 가는 자리마다 '내 친구 송창식'을 추켜세웠다.
다시 동백꽃이 핀다. 남해의 한적한 바닷가나 정갈하게 비질한 절마당을 걸어 동백꽃을 보러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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