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없어 TV 접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
중국서 탈북민 방송프로 본 뒤 서울행
北출신 남편과 9년 만에 내 집 마련 성공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한국자유총연맹 김포지회 김가람 사업총무과장의 고향은 함경북도 온성이다. 한반도 최북단 지역으로 중국과 접경하고 있다.
김 과장이 유년시절이던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이란 엄혹한 시기가 닥쳤다. 큰 수해에 극심한 식량난이 이어져 당시 2400만 명 주민 가운데 200~30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의 참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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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가람 한국자유총연맹 김포지회 과장은 함북 온성 출신의 탈북민이다. 김 과장은 최근 자신의 집을 장만해 두 아이의 방을 꾸밀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0.26 yjlee@newspim.com |
그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집은 '하모니카 주택'이라 불리는 부엌 하나에 방 하나뿐인 작은 공간이었다. 하모니카 주택은 북한에서 6.25전쟁 이후 전후 복구기에 대량으로 지어진 공동 주택을 말한다.
여러 세대가 벽을 맞대고 일렬로 붙어 있는 단층 연립주택인데, 그 좁은 집에 할머니와 부모님, 오빠, 언니까지 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 집은 늘 따뜻했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술기운이 살짝 오른 날이면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빠의 재미있는 이야기 덕에 웃음 끊이지 않던 집안"
김 과장은 "전기가 없어 TV도 볼 수 없었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아버지 덕분에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열 살 되던 해, 운 좋게 지인의 추천으로 한 동 두 세대짜리 집으로 이사하게 됐다. 부엌과 방 두 개, 창고 하나에 복도로 쓰이던 작은방까지 갖춘 그 집은 당시 온성에서는 간부들이 사는 집에 버금가는 넓은 집이었다.
가구며 살림살이는 변변치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여서 그곳은 그 어떤 집보다 따뜻한 곳이었다.
그 시절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니와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였다. 저녁이면 마당에 둘러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친구들을 불러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소박하지만 웃음과 음악이 넘치던 그 집에서의 시간은 그녀의 마음속에 여전히 가장 빛나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2007년, 열일곱의 나이에 그녀는 가족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당시 미성년자에다 공식 신분조차 없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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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북 온성 출신인 김가람 한국자유총연맹 김포지회 과장은 지난 9월 열린 탈북민 노래자랑 본선에 진출해 장려상을 받았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0.26 yjlee@newspim.com |
다행히 한 노부부의 도움으로 그들의 집에서 가정부일을 시작하며 머물 수 있었다.
처음에는 24시간 전기를 쓰고, 마음껏 TV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사회 경험 없이 뛰어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당한 월급이나 용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지내면서, 가족을 돕기 위해 떠났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책감이 점점 마음을 짓눌렀다.
◆탈북민들 정착해 당당한 삶 사는 모습에 한국행 결심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로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다 우연히 TV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보게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당당히 신분을 갖고,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불꽃이 일었다. 그 순간부터 언젠 가는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남의 집에서의 생활은 불안과 눈치를 감수해야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한 결심을 다지게 한 공간이기도 했다.
2016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처음 정착한 곳은 거실과 방 하나뿐인 작은 집이었다. 대안학교에 다니며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고, 낮에는 아르바이트, 밤에는 공부를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외롭고 낯설었던 그 공간은 몸을 쉬게 하는 곳이면서도, 이곳에 발을 붙이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다그쳐야 했던 치열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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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함북 온성 출신인 김가람 한국자유총연맹 김포지회 과장은 고향을 떠난 지 17년 만에 자기집을 갖게 됐다. 이제 이 곳이 두 아이가 인성 바르게 자라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길 소망하고 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5.10.26 yjlee@newspim.com |
이후 지인의 소개로 같은 북한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부부는 조금 더 넓은 국민임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부모와 친척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아이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당황하기도 하고, 어디 물어볼 곳조차 없는 상황에서 모든 육아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그때 어려움에 머무르기보단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성격이 빛을 발했다. TV프로그램과 육아 전문가 영상들을 찾아보며 스스로 양육법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두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집은 점차 '고된 싸움터'에서 '가족의 보금자리'로 바뀌어갔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둘째는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현재는 김포시 자유총연맹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며 단체의 실무를 맡고 있다. 다양한 단체장들과 공무원, 봉사자들과 어울려 일하고, 독거노인이나 지역의 탈북민을 돕는 봉사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탈북민 노래자랑 본선 진출해 장려상 수상하기도
김 씨는 노래에도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다. 지난 9월 7일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 화센터에서 열린 제4회 전국 탈북민 노래자랑 본선에 진출해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 가람 씨는 한국 생활 9년 만에 마침내 자신만의 집을 마련했다. 곧 새 아파트로 이사할 예정이다. '대단하다'는 말에 그녀는 "은행 집이죠, 뭐"라며 웃었지만, 표정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새집에 들일 가전과 가구를 고르고, 두 아이의 방을 어떻게 꾸밀지 계획을 세우며 보내는 요즘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했다.
북한의 집을 떠난 지 17년 만에, 스스로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의 집' 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곳이 두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인성이 바른 아이로 자라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내비쳤다.
한반도 최북단의 마을에서 자유를 찾아 탈북의 길을 떠난 후 한국 정착에 성공한 김 과장은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슈퍼맘으로 자리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