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김성주는 이종락 부대가 해체된 그해 1931년 여름 만주 무송에 나타났다. 봉천에 있던 평단중학교 동창생 중국인 장아청(張亞靑)과 동행하고 있었다. 둘은 무기 밀매업을 하는 비적(匪賊) 두목 조전승(曺全勝)으로부터 얻은 일본군 권총을 차고 있었다. 무송 지역 일대의 20살 전후의 또래들을 모아 공산주의 혁명 명분을 내세우며 중국인 지주만을 골라 약탈을 일삼았다. 이때 그는 김일성(金一星)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다.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 놈 김일성 일당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라는 원성이 비등해졌다.

당시 무송에는 국민부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중대장을 역임한 장철호(張喆鎬, 본명 장치욱(張致旭)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펴보니, 김성주 일당을 그대로 두면, 중국 사람 간에 한인 배척 운동이 일어나서 무송 일대의 한인 처지가 매우 곤란해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래서 1932년 2월 만주 흥경현 왕청문에 있는 조선혁명군 본부로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제보하였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은 조선혁명군 소대장 고동뢰(高東雷)에게 김성주 일당 토벌을 명령했다. 고동뢰는 부하 9명을 무장시켜 무송으로 떠났다. 조선혁명군은 무송에 도착한 첫날 밤 한방에서 9명이 함께 잠을 잤다. 김성주 일당이 이 사실을 포착했다. 이날 밤 곤하게 잠이 든 고동뢰와 소대원 9명 등 10명을 모두 살해한 후 권총 등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
이 일이 있은 지 1개월 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 세워졌다. 조선혁명군 양세봉 장군은 중국 국민당 장학량 군벌 예하 당취오(唐聚伍)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김성주가 중국공산당원 몇 명을 데리고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을 찾아왔다.
양세봉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으로 양서봉(梁瑞鳳), 양윤봉(梁允奉) 등이 있다. 정의부 독립군으로 활약할 때 3·1운동 33인 중 한 명인 오동진을 상관으로 모셨다. 오동진과 김성주 아버지 김형직은 평양 숭실학교를 같이 다닌 친한 친구 사이이다. 김형직이 오동진의 정의부 일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양세봉과도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양세봉은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를 알고 있었다. 그는(양세봉) 김성주를 장차 독립군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