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시', '시인의 소설' 동시 출간한 잉걸북스
'CROSS' 시리즈... 금기를 깬 15인의 문학적 저항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서점에 가면 소설 코너와 시 코너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작가들 역시 등단부터 '시인'과 '소설가'라는 분명한 명패를 달고 시작한다. 가끔 양쪽을 넘나드는 시인이자 소설가가 없지는 않지만 그리 흔치는 않다. 소설가가 시를 쓰거나 시인이 소설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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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잉걸북스가 펴낸 크로스 시리즈. [사진 = 잉걸북스] 2025.12.08 oks34@newspim.com |
굳건해 보이는 문학의 담장을 허문 책이 나왔다. 도서 출판 잉걸북스(대표 신승철)가 최근 동시에 출간한 문학선 '소설가의 시:CROSS 001'과 '시인의 소설:CROSS 002'는 한국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파격적인 실험을 담았다. 내로라하는 소설가 10명이 시를 쓰고, 중견 시인 5명이 소설을 써서 나란히 세상에 내놓았다. 단발성 외도가 아닌, 장르의 본질을 묻는 진지한 '크로스오버'다.
▲ 소설가, 불안을 삼키고 노래가 되다
소설가에게 문장은 노동이다.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아 올려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다. 논리와 서사, 개연성이라는 중력에 묶여 있는 이들이 '시'라는 무중력 공간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설가의 시'에 참여한 10명의 작가(권재이, 김도언, 김태용, 문형렬, 서하진, 은미희, 이만교, 이명랑, 전경린, 한창훈)는 소설로는 다 해소되지 않던 내면의 응축된 '불안'을 시로 토해냈다.
소설가 전경린은 "소설이 노동이라면 시는 노래 같다"고 고백한다. 촘촘한 서사로 설명해야 했던 감정들을 단 몇 줄의 직관적인 언어로 터트리는 쾌감. 소설가 김도언은 "소설은 개연성을 갖추는 과정에서 불안의 원형이 훼손되지만, 시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삼켜버린다"며 시 쓰기의 매혹을 전했다.
이들의 시는 기교보다는 날것에 가깝다. 한창훈은 거문도의 노동과 과거의 폭력을 시에 담았고, 은미희는 소멸과 적멸을 노래했다. 이만교는 자본주의적 부조리를 풍자했다. 전문 시인의 세련됨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꾼들이 작정하고 압축해 낸 언어의 밀도가 묵직하다. 평론가 김나정의 말처럼 "식물을 짓눌러 뽑아낸 석탄처럼 뜨겁고, 공룡을 응축한 석유처럼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시들이다.
▲ 시인, 별에서 내려와 길을 걷다
반면, 찰나의 미학을 다루던 시인들은 왜 긴 호흡의 소설을 택했을까. '시인의 소설'에 참여한 5명의 시인(강정, 김이듬, 박정대, 이승하, 전윤호)은 '생존'과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기 위해 서사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들에게 소설은 현실의 경계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도구다. 박정대 시인의 중편 '눈의 이름, 1644년 파리 무용 총서'는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문장으로 1644년과 2044년을 오가며 시간의 선형성을 파괴한다. 이는 마치 한 편의 장시(長詩)를 읽는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김이듬 시인은 소설 '불과 비'를 통해 사회적 압박 속에 놓인 개인의 위태로운 생존기를 담담히 기록했다.
소설가 하성란은 이들의 소설을 두고 "시의 언어가 어떻게 서사의 공간을 재구성하는지 확인하는 순간마다 경이롭다"고 평했다.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점(點)'의 세계에 살던 시인들이 인물과 사건이라는 '선(線)'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는 기존 소설 문법이 보여주지 못한 독특한 입체감을 선사한다.
▲ 자유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 장르에 대한 저항
이번 기획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저항'이다. 잉걸북스 측은 "자유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이며, 내용과 형식뿐 아니라 장르에도 저항이 필요하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시 쓰는 이가 소설에 도전하고, 소설 쓰는 이가 시에 도전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문학적 생명력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루카치는 "소설(길)의 지도는 태초에 시(별)가 가리켰다"고 했다. 이번 두 권의 책은 별을 보던 이들이 길을 걷고, 길을 걷던 이들이 별을 노래하는 현장이다.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작가들의 낯선 얼굴을 마주하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소설가들의 시집에는 해설 대신 작가들의 솔직한 '시작(詩作) 노트'가, 시인들의 소설집에는 치열한 서사 실험이 담겼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문학은 더 넓어진다. "이런 기획이 가능할지 몰랐다"는 류근 시인의 추천사처럼, 이번 'CROSS' 시리즈는 한국 문학장에 신선하고도 통쾌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책에 일련번호를 붙인 걸로 보아 책이 잘 나가면 계속 발행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oks34@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