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동호 기자] #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을 예상하고 상당한 규모의 증자를 실시한 대형 증권사들이 1년여간 곤혹을 치뤘다. 개정안 통과를 기다리느라 증자 자금을 본래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기차입금 상환 등 사실상 놀리다시피 했다. 삼성증권은 4000억원 가까운 증자 자금 중 일부만을 헤지펀드 시드머니로 사용했을 뿐 대부분의 자금은 단기 차입금 상환에 사용했다. 한국투자증권 역시 7000억원 규모의 증자자금 중 대부분을 콜머니와 기업어음 상환에 사용했다. 그 결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이 5% 이하로 하락했다.
대형 투자은행(IB) 육성과 코넥스(KONEX: 중소기업전용주식시장) 신설, 대체거래소(ATS) 설립 등 내용을 담고 있는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이하 자통법 개정안)은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을 외치며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자통법 개정이 늦어지며 자본시장 관계자들의 속을 태우고 있다. 증자한 자금이 묶이는 것은 물론 치열해지는 글로벌 시장 경쟁에서 국내 자본시장의 경쟁력 확보가 지연되고 있는 셈이다.
◆ 지지부진 개정안, 속타는 금융투자업계
자통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고 해서 당장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형 IB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안조차 마련되지 않아 확충한 자본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박선호 메리츠종금증권 애널리스트는 "IB 시장의 낮은 단기 성장 가능성과 함께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은 부담 요인"이라며 "당분간 자본 활용도가 낮은 저위험 중개업무 중심의 수익구조상 한계로 인해 유휴자본 부담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정훈 국회 정무위원장 역시 이달 초 뉴스핌과의 인터뷰에서 "국회에서 빨리 자본시장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본다"며 "증권사들이 다들 어려운 상황에서 투자은행이 빨리 돼야 외국 투자은행과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투자도 유치하고 한국 금융의 실력도 늘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해외 자본을 유치하고, 그들과 함께 제 3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투자은행 간 파트너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동에 가봐도 큰 투자회사들이 있는데, 우리한테도 그곳과 카운터파트(counterpart)가 가능한 투자회사가 있어야 일이 진척을 보이지 않겠냐"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조속한 개정안 통과를 바라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205개 금융투자사를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기업의 80.0%가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형 투자은행(IB) 육성과 대체거래소(ATS) 도입, 장외거래 중앙청산소(CCP) 도입 등에 대해 대부분 찬성 의견을 보였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대체거래소(ATS) 도입, 장외거래 중앙청산소(CCP) 도입 등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경기 침체로 수익성이 정체된 금융투자사들에 새로운 먹거리를 가져다 줄 것이란 기대감이 나타나고 있다"고 풀이했다.
◆ 자통법 개정안, 무엇이 달라지나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자통법 개정안은 선진 자본시장 도약을 위한 새로운 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대형 투자은행(IB)의 육성과 ATS 도입, 자본시장 인프라 확충 등은 업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사안이다.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부분은 대형 IB의 허가다. 현재 개정안은 3조원 이상의 증궈사들에게 기업 인수합병(M&A) 자금 대출과 비상장주식 직거래, 헤지펀드 관련 업무를 포함한 프라임브로커 업무를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프라임브로커는 헤지펀드가 요구하는 모든 서비스를 한 번에 제공할 수 있는 업무다. 헤지펀드의 설립부터 자금대출, 주식대여, 증거금 대납ㆍ대출, 자산보관, 결제, 투자자 소개는 물론 법률자문과 사무소 소개 및 임대까지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야당은 자기자본 규모 3조원 이상의 일부 대형 증권사에만 이 같은 신규 IB 업무를 허용하는 것은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기조와 어긋난다며 보다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훈 위원장은 "야당 쪽에서 투자은행이 재벌들에게 또 통로를 터주는 것 아니냐는 시선인데 그걸 막는 방법을 찾아야지 법 자체를 막으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대형화를 이룬 증권사에 프라임 브로커리지와 기업여신, 내부주문집행, 헤지펀드 운용 및 판매, IB 활성화 등 새로운 비즈니스를 과점적으로 열어주고 있다"며 "그 외 신규 비즈니스 대부분을 대형 증권사에만 허용함으로써 대형화의 정책 효과를 보다 강화시킬 계획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TS 제도 도입도 민감한 사안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120여개의 ATS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국내는 다소 늦은 편이다.
ATS는 한국거래소 이외의 중개자를 통해 주식 등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으로 거래비용 인하와 시스템 활성화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투자자들이 스스로 거래하는 시장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자본시장 개혁이 시급하다"며 "한국형 투자은행(IB)을 육성과 ATS 및 CCP 제도를 도입해 자본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중소기업만을 위한 전용 주식시장인 코넥스 설립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 개정안, 중·소형사는 소외?
이번 자통법 개정안이 금융투자업계의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프라임브로커 등 상당수 개정 내용이 일부 대형사만을 위한 것이란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기업 인수합병(M&A) 자금 대출이나 프라임프로커 등 새로운 수익원이 될 수 있는 사업을 하기 위한 자기자본 요건을 갖춘 증권사는 5곳뿐이다.
김기식 민주통합당 의원은 금융에 대한 규제 조절은 일반 제조업과는 다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일부 대형 증권사들에 대해 "산업계열 증권사들의 경우 계열사 물량으로 편하게 살아왔다"며 "재벌의 금융 계열사로 자산운용, 퇴직연금 등 특혜를 받아오며 우물안 개구리 영업을 해오던 곳들이 지금은 규제 때문에 해외영업 못하겠다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전형적인 남탓이란 비판이다. 김 의원은 "이들 때문에 (오히려) 실력있고 가능성 있는 중소형사의 성장이 봉쇄된 측면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비판을 반영하듯 일부에선 인수합병(M&A)이나 증자 등을 통해 당장 자본확충을 할 수 없는 중소형 증권사과 대형사들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또한 대형사들에게 신규 비지니스가 허용되더라고 주식 브로커리지와 자산관리 등 기존의 사업 모델 역시 고수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이 경우 기존 비지니스의 경쟁 구도는 더욱 악화되고 결국 이는 중소형사들의 실적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대형 증권사에만 신규 비즈니스가 허용된다 해도 기존의 비즈니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 비즈니스의 경쟁 구도는 더욱 악화될 여지가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또한 "신규 비즈니스의 수익성이 제한적이거나 성장을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면 대형 증권사는 기존 비즈니스에 집중함으로써 산업의 경쟁이 더욱 심화되는 부정적 순환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핌 Newspim] 김동호 기자 (goodh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