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가 화두다. 창조경제를 논할 때, 흔히들 예의 이분법에 따라 과거 개발 경제시대의 정책과 경험은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창조경제의 모델을 우리 자신의 뼈저린 개발경험에서 찾기 보다는 우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이 다른 선진국에서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돌이켜 보건데 물적 인적자본이 열악했던 과거 개발시대에 과학기술개발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모방에 의한 것이었을지라도 당시로서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창조경제의 혁신보다도 거대한 모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거대한 모험에서 대한민국 호는 세계에서 드문 성공 신화를 일구어내었다. 그렇다면 창조경제의 유전자를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별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부모 선배들이 일구어 낸 개발경제시대의 성공 신화에서 그 일부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까?
최근 필자는 창조경제의 유전자를 찾을 요량으로,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들과 창조경제가 70~80년대 개발시대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첫째, 삼성, 포스코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과학기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둘째, 정부 정책이 민간과의 유기적 역할분담과 협조과정을 통해 집행되었을 때 성공적으로 실행되었으며; 셋째, 정책실행 과정에서 기업인의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이 십분 활용된 경우 성공의 지속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서는 흔히 잘 알려진 제조업 분야가 아니라서 좀 생소하겠지만, 보건 분야에서의 기생충 박멸과 구충제 개발 사례를 통해 위의 사실을 살펴보도록 한다.
50~60년대 우리나라는 열악한 공중보건 환경으로 인해 기생충이 만연했다. 이에 정부는 1964년 기생충 박멸협회를 설립한 이후 1966년 관련법을 제정하고 기생충 감염에 대해 범 국가 차원의 적극적 대책을 시행했다. 이 결과, 69년 90%대였던 기생충 감염률이 81년 41%, 92년 4%로 급속히 감소됐다.
이처럼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게 초단기간에 기생충을 박멸시킨 쾌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이러한 신화적 쾌거는 강력한 법적근거와 추진기관 설립, 범국민적 보건 교육 및 새마을 운동을 통한 환경개선 사업, 집단 검진을 가능하게 한 효율적 기생충 표준검사법의 개발, 구충제의 안정적 확보에 의한 집단투약 실시라는 네 박자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기생충 박멸사업은 정부 사업이었지만 정부는 이의 집행을 정부 부처가 아닌 사단법인인 기생충 박멸협회에 맡겨 초창기 부족한 전문 인력, 장비, 그리고 전국적 네트워크를 빠르게 확보하도록 했다. 1969년부터는 전국의 모든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기생충 검사를 받게 함으로써 기생충 박멸에 결정적 전기를 이룩했다.
이 과정에서 임한종 박사 (고려대 명예교수)는 셀룰로판 검사법을 도입하여 학생 800만 명에 대한 집단검진이 가능하게 하였다. 셀룰로판 검사법은 일본에서 갓 개발한 것을 당시 임한종 박사가 실용성과 효율성을 검증해 채택한 검사법으로 이후 비효율적이던 원심분리 검사법을 대체한 기생충 대변검사의 세계 표준검사법이 됐다.
한편 국내 제약회사들은 70년대 초 KIST와의 공동 연구로 메벤다졸, 프란텔 파모에이트 등 기생충 원료의약품의 합성공정을 자체개발하여 수입대체효과와 함께 구충제를 원활히 공급하여 집단투약이 가능하게 하였다. 70~8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정부는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았고, 외화소비 억제를 위한 특관세 제도를 도입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보호정책을 국내 제약업계는 십분 활용하여 공정기술 개발을 통하여 시장을 확보하고, 80년대 이후 국내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선진국 의약품과의 경쟁에 대비할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한 예로 1983년 신풍제약은 KIST와 공동으로 간디스토마 특효약물인 프라지콴텔을 저가의 합성제조 공정을 개발하였다. 신풍제약은 바이엘의 10분지 1도 되지 않은 저가의 공정기술을 바탕으로 당시 독점 공급사이던 바이엘을 국내 시장에서 몰아내었고, 이후 90년대 바이엘과 머크의 물질특허가 만료되면서 세계 시장의 최대 공급자로 등극했다.
이렇게 국내 제약회사들이 구충제라는 틈새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된 배경을 보면, 기생충 박멸이란 새로운 시장을 형성시킨 정부의 보건정책, 물질특허 불인정과 특관세 부과로 대표되던 국내 산업보호 정책, 민관연의 유기적 협조에 의한 저가의 효율적 공정개발, 새로운 기회에 기민하게 대응한 기업가 정신 등이 성공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약회사들이 기생충 시장에 진입하게 된 배경을 보면, 정부 지도보다는 민간 기업이 주도한 새로운 기회에 대한 도전이라는 면이 강하였다. 동국제약의 경우 시장흐름을 파악한 권동일 회장이 1972년 KIST와 프란텔 파모에이트의 원료합성계약을 체결하여 1년여의 연구 끝에 73년 후반기부터 원료를 공급했다. 기생충 원료의약품의 합성공정에 대한 도전은 당시의 제약업계 상황에서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강력한 기업가 정신과 정부 및 연구기관의 유기적 지원이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기생충 박멸사업의 성공사례가 던져주는 창조경제에 대한 시사점은 무엇일까?
첫째, 정부의 강력한 정책과 추진력, 둘째, 집단 진단과 투약을 가능하게 한 이익집단(학교, 학생, 부모)의 협조, 셋째, 보건환경 생태계 구축으로 기생충 박멸사업 측면지원 (새마을 운동을 통한 위생 환경개선 및 보건교육), 넷째, 기생충 박멸사업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한 기업가 정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정부와 연구소의 유기적 지원이 성공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제약회사들의 성공사례는 중소기업체도 국내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기술력만 있으면 틈새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 후진국 시절에서 선진국 문턱에 이른 지금, 창조경제를 추진함에 있어, 기생충 박멸사업에서와 같은 강력한 정책과 실행력, 민관연의 유기적 협조, 민간 기업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지원 등을 기대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주문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본 글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서 아시아개발은행 (ADB)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나성섭 아시아개발은행(ADB) 남아시아 인간 사회개발 디렉터 프로필.
고려대학교를 거쳐 1993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이후 일본 국제기독교대학과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국제경제기구인 ADB의 남아시아 인간사회개발 디렉터로 근무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의 경제, 인프라, 교육, 보건, 사회보장 등 폭 넓은 분야에 대한 정책 및 투자계획 입안 및 실행에 직접 참여한 생생한 현장 정책 경험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