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은 당황스러웠다.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자기가 한 맹세를 어기면 신하들 앞에 위신이 말이 아니다. 맹세를 지켜 살로메의 요청을 들어주자니 요한의 목을 자른 이후에 일어날지 모를 사태가 또 걱정이었다. 하지만 헤롯은 요한을 죽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를 통해 앙숙을 제거하고 싶은 검은 욕망이 불끈 솟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헤롯은 요한의 목을 살로메에게 주라고 명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 신하들은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갖다 주었다.
이것이 선지자 세례 요한의 최후다. 이 세례 요한을 랍비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음 귀절의 내막을 파헤치면서.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이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12)’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는 자가 자기 사명이나 다 할 것이지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 개죽음을 당했냐는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구약에도 명시되어 있고 요한 스스로도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라고 말했듯 분명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수 자신도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라는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며 분명히 했다. 예수 앞에 서서 예수를 증거하고, 촌놈 같아 보이는 이 분이 바로 여러분이 구약 사천 년 동안 간절하게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라고, 바리새파나 사두개인들에게 목이 쉬도록 설파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이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맥빠진 방황을 하고 있으니 말이 되는 소리냐는 것이다. 메시야 증거라는 역사에서 둘도 없는 절대적인 사명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완수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왕의 불륜 따위나 건드리다가 목 잘림 당했으니, 그의 증거를 받아 역사를 펴려 했던 예수의 속이 얼마나 탔겠냐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단단한 디딤돌이 되어야 할 요한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라고 혹평하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는 것이다. 소경을 눈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고치고 죽은 자를 고치는 권능들을 요한에게 알게 해 자기가 바로 메시야임을 선포하며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요한의 실족을 힐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