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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상소 하나가 뒤흔든 수도이전 논란

기사입력 : 2020년07월30일 15:59

최종수정 : 2020년07월30일 17:27

교하 천도 꿈꿨던 광해군...극렬 반대에 수도이전 무산
서경 수도이전 놓고 내전까지 벌인 '묘청의 난'
수도이전은 '국민적 합의'...쉽게 말할 사안 아냐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광해군 4년(1612년) 음력 8월6일. '한 장의 상소'가 나라를 뒤흔든다. 상소를 올린 사람은 선왕인 선조 때부터 왕릉을 정하는 등 왕실의 풍수지리를 도맡았던 지관(地官) 이의신(李懿信)이었다.

이의신의 상소로 임진왜란 이후 어수선하던 정국은 격랑에 휩싸인다. 상소 내용은 다름 아닌 '천도(遷道)', 수도이전이다.

◆광해군, 교하천도의 꿈 

이의신의 상소 내용은 '한양의 지세가 다했으니 교하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교하는 지금의 파주 일대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파주시내와 운정 신도시(옛 교하읍), 탄현면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임진강과 한강이 맞닿고 서해가 인접한 넓직한 장소로 현재는 북한과 맞닿은 초접경지다.

이의신의 상소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 전문이 나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상소 이후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의논해보라"고 내려보낸다. 이후 예조판서 이정귀가 광해군에게 '수도이전 불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이의신의 상소내용을 엿볼 수 있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하여, 도성의 왕기(旺氣·왕성하게 될 징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交河縣)에 세워 순행(巡幸·왕의 이동)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니, 왕이 예조에 내려 의논토록 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귀가 회계하기를 "지금 의신은 임진년의 병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의 관리들이 분당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국도의 탓이라고 합니다. 풍수의 설을 받들어 믿을 만하고 가능치도 않은 일들이 낱낱이 맞는다 하더라도 도성을 옮기는 일은 막중 막대한 일이니, 비록 곽박이 건의하고 이순풍이 계책을 세웠다 하더라도 오히려 경솔히 의논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의신의 방술에 대한 수준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1764년 이명유가 소지하던 교하군읍지(交河郡邑誌) <자료=한국학자료포털> 2020.07.30 fair77@newspim.com

이의신은 상소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고, 조정의 대신들이 당파로 나눠 서로 싸우는 등 이유가 한양의 지기(地氣·땅의 기운)가 다해 그런 것이니 풍수지리를 참고하면 수도를 파주 교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교하천도'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교하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면 왕기를 흩트리고 백성을 현혹케 한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아 단박에 이의신을 처단했을 것이다.

'이의신의 상소내용을 논의하라'고 내려보낸 자체가 광해군도 수도이전에 대한 의지가 상당했다는 점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예조판서가 대표로 나섰지만, 신하들의 교하천도에 대한 반감은 상상이상이었다. 이정귀의 답변에는 가시가 돋혔다. 고려시대 수도이전 논란으로 내전으로 발전한 '묘청의 난'을 들먹이며 '자칫하면 반란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한다.

다시 이정귀의 발언이다. "소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서로 뜬소문에 동요되어 더러는 '성상께서 이 말을 믿는다' 하고, 더러는 '새 궁궐에 나가지 않는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여, 원근이 모두 놀래고 현혹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단이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일이 예로부터 그러했으니, 고려 말엽에는 요승(妖僧) 묘청(妙淸)이 음양의 설로 임금을 현혹하기를 '송경(松京·개경)은 왕업이 이미 쇠퇴하였고 서경(西京·평양)에 왕기가 있으므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새 궁궐을 서경 임원역에 지었으나 끝내는 유참 등의 변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고사도 이와 같은데,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광해군은 불쾌했다. 그래도 수도이전에 대한 의지는 꺾지 않는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광해군이 수도이전지로 삼은 교하지역의 옛지도. 관해군인 임진왜란 이후 수도이전을 통해 조선의 제2건국을 꿈꿨다. 지도는 1872년 만들어진 작자미상의 조선후기 지방지도. <자료=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소>2020.07.30 fair77@newspim.com

왕이 다시 하명한다. "예로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제왕이 많았으니 본디 세웠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는 말로서 이 말을 믿는다고 임금을 지척하니 너무 놀랍다. 앞으로는 이러한 말을 경솔하게 내지 말도록 하라. 소장의 끝에 있는 회계의 일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상의하여 의계토록 하라." (광해군일기 정초본 59권, 광해 4년 11월15일 을사 2번째 기사)

한바탕 난리가 난 지 두 달이 지난 광해군 5년(1613년) 음력 1월 3일. 광해군은 수도 이전을 본격 추진한다. 임진왜란 이후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관청인 비변사에 비밀하교를 내린다. 하교는 '수도이전을 할 교하지역 산세를 탐색하고 그려오라'는 것이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62권 신유 3번째 기사다. 왕이 비밀로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다.

"자고로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하였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는 강화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하고 싶다. 대신과 해조 당상은 헌관·언관·지관과 같이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 오라."

왕의 비밀지시가 내려오자 조정은 쑥대밭이 된다. 신하들은 당파를 초월해 모처럼 '한마음'으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논쟁은 2년 넘게 이어진다. 광해군은 "주나라는 만세가 우러러 본받는 나라인데 호경과 낙양이 있었고, 지금 명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 있다. 의신이 국가를 위하여 큰 계획을 진달한 것은 이궁(離宮)을 창건하자는 데 불과할 따름이다"(광해군일기 정초본 79권, 광해 6년(1614년) 6월 14일)라면서 반발을 일단 피해가려 하지만, 신하들의 끈질긴 반대로 끝내 교하천도는 무산된다.

예조판서 이정귀를 비롯한 신하들의 '왕위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예언으로 돌아온 것일까. 천도론을 꺼낸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쫒겨났다.

◆'동전'으로 점을 쳐 정해진 수도 한양

따지고 보면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 수도로 낙점된 한양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양과 무악(현재 연세대학교 일대), 충남 계룡산 인근의 3곳을 수도 후보지로 정한 조선왕조는 처음에는 계룡산 일대를 수도로 정하고 궁궐 건설까지 착수한다.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畿內)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가 모두 81이었다.(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3월 24일)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조선 태조와 태종 때 수도이전이 논의될 때마다 거론된 후보지 무악(빨간 표시). 현재 연세대학교 부근이다. <자료=수선전도>2020.07.30 fair77@newspim.com

하지만 신하 하륜이 반대하면서 한양으로 급반전한다. 태조 2년(1393년) 12월 11일 기사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서북방향)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남동쪽)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 바, '물이 장생을 파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도읍을 정한 계룡산 땅이 크게 보면 한반도 중심부가 아니라 남쪽에 치우쳐 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길이 좋지 않아 도읍지로 부적합하다는 주장이다.

태조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도읍지를 물색해 조정 대신들의 갑론을박 끝에 현재 한양도성으로 정하고 수도를 정하게 된다.

그런데 한양은 천도(1394년) 이후 5년만에 다시 수도의 지위를 내주게 된다.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이후 명분과 눈치상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태종 대신 잠시 왕위에 오른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해 버린다.

임금이 종친과 좌정승 조준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에는 대소신료와 숙위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이 모두 완전합니다."(정종실록 1권, 정종 1년(1399년) 2월 26일)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한양천도가 추진된다. 피바람 끝에 왕위에 앉은 태종으로서는 정몽주를 죽였던 일 등을 기억하는 개경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터에다, 고려왕조의 향수가 남아 있는 개경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아버지 태조의 신뢰를 받는 일이 급선무였다. 태조가 공들여 세운 새왕조의 수도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명분도 있고, 개경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피할 기회로 삼는데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인천=뉴스핌] 정일구 기자 = 인천 강화군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마을 너머로 개성 송악산이 보이고 있다. 2020.06.19 mironj19@newspim.com

개경으로 환도한 지 2년만인 태종 1년(1401년) 음력 7월23일. 태종이 말한다. "내가 한양으로 돌아가겠으니, 서운관으로 하여금 떠날 날을 점치어 알리라."

새 왕조가 열렸다 해도 대소신료들의 주무대는 개경이었다. 어렵사리 집과 재산이 있는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2년만에 당시로서는 신도시인 한양으로 왕이 돌아가겠다고 하니 속된 표현으로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만만찮은 반발이 이어졌다. 좌사간 윤사수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용서했다. 4년이 흐른 태종 5년(1405년)에는 의정부에서 '흉년'을 이유로 한양 환도를 반대한다. 태종은 10월에는 반드시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양은 조선의 수도가 된다.

당시 신하들의 반발이 극심하자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전점'까지 동원한다. 왕들의 조상 신주를 모신 종묘에 가서 동전으로 점을 쳐서 '한양에 다시 갈지 말지'를 결정한 것이다. 동전으로 점을 쳐서 조상들에게 물어보니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뜻이 나왔기 때문에 재천도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하기 1년전인 태종 4년(1404년) 음력 10월 6일. 임금이 종묘 문밖에 나가 여러 사람에게 포고했다.

"이제 종묘에 들어가 송도(개경)와 신도(한양), 무악(현재 연세대 부근) 고(告)하고, 그 길흉을 점쳐 길한 데 따라 도읍을 정하겠다. 도읍을 정한 뒤에는 비록 재변이 있더라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조선 태종은 한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길 때 동전으로 점을 쳐 수도이전의 명분을 만들었다. 사진은 고려 성종 때 주조된 한국 최초의 동전화폐 건원중보(乾元重寶) <자료=한국은행 화폐박물관> 2020.07.30 fair77@newspim.com

점치는 물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척전(擲錢)으로 하기로 한다. 척전은 한꺼번에 동전 셋을 던져 1개가 뒷면이 나오고 2개가 앞면이 나오면 단(單)이라 해 작대기 하나 모양으로 표시한다. 2개가 뒷면이 나오고 1개가 앞면이 나오면 탁(拆)이라고 작대기 두개를 나란히 놓은 모양으로 놓는다. 3개가 모두 뒷면이 나오면 중(重)이라 하여 O로 나타낸다.

3개가 모두 앞면이 나오면 순(純)으로 X로 표시한다. 세번 던져 하나의 괘(卦)를 만들어 길흉을 판단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개경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사용했다는 이유 등도 고려됐다.

태종은 신하를 거느리고 종묘에 예배한 뒤 완산군 이천우·좌정승 조준·대사헌 김희선·지신사 박석명·사간 조휴를 거느리고 묘당에 들어가 꿇어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척전을 던지게 했다. 한양은 2길 1흉이 나왔다. 개경과 무악은 모두 2흉 1길이었다.

동전점을 친 결과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맞다'는 조상의 뜻이 나온 셈이다. 드디어 태종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다만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꺼려 창덕궁을 지어 이궁으로 삼았다.

◆수도이전 놓고 내전(內戰)까지

한국사에서는 수도이전을 놓고 내전(內戰)까지 벌어진 경우도 있다. 고려 인종 시대 '묘청의 난'은 서경(평양) 천도를 둘러싸고 국론이 둘로 갈라져 전쟁까지 불사한 사건이다.

고려사 열전 권제40 반역(叛逆) 부분에는 묘청에 대한 인물평이 서술돼 있다.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 정지상 등과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서경천도운동을 벌였다. 당시 임금인 고려 인종이 묘청의 말을 듣고 서경에 궁궐까지 짓고 실제로 이동까지 한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각종 이변과 재해'가 잇따르자 불안감을 느낀 왕이 수도이전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자 인종 13년(1135년)에 묘청이 분사시랑 조광·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조창언·안중영 등과 함께 서경을 근거지로 삼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돼 있다.

반란은 1년간 이어졌지만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등에게 진압된다. 고려사에는 김부식 군대가 진격하자 서경 사람들이 묘청의 머리를 베어 바쳤다고 저술돼 있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처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 일천년래 일대사건'으로 명명했다. 신채호는 묘청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낭가사상과 신흥 이데올로기로 떠오른 당시 유교사상이 맞붙은 사건으로 정의했다.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어 잠시 접어두더라도, '묘청의 난' 자체를 놓고 본다면 수도이전은 단순히 지도상 위치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내전까지 불사할 정도의 복잡다단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의 모습. /김학선 기자 yooksa@

◆헌재 행정수도 위헌판결 핵심은 '국민적 합의'

최근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에 대해 위헌판결(2004헌마554)을 내렸다.

당시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읽어봤다. 세간에서는 '관습헌법'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았다 하지만 다시 찬찬히 들여다 본 판결문의 포인트는 '국민적 합의'다.

문자로 형식화한 헌법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수도=서울'이라는 관습적 명제를 인용해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수도이며, 관습헌법도 성문헌법처럼 헌법과 다름없으니 수도를 이전하려면 헌법적 절차를 거치는 게 핵심이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합의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를 통한 국민의견을 물어야 한다. 즉, 일부 정당과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도이전을 논의하지 말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헌법에 명시하라는 이야기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4·15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헌법개정에 필요한 전체의석(300석)의 3분의2(200석)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야당과 소통이 필수적이다.

수도이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사람들도 곤욕을 치렀다. 한국사에서는 수도이전 이슈로 내전까지 발발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재산권 등이 걸려 있어 첨예하고 극단적인 논란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최선은 아니지만 16년전 판결문에 드러난 '국민적 합의'라는 문구가 허투루 들리지만은 않는 시점이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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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동행카드, 고양·과천도 30일부터 [서울=뉴스핌] 이경화 기자 = 서울시는 '기후동행카드'가 오는 11월 30일 첫 차부터 고양시와 과천시까지 서비스를 확장한다고 21일 밝혔다. 이로써 서울~고양~과천을 오가는 시민들도 월 5만~6만원대로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난 1월 27일 서울 지역을 대상으로 출발한 기후동행카드는 3월 30일 김포골드라인, 8월 10일 진접선·별내선까지 확대됐다. 서울 공동생활권인 인구 100만의 대규모 도시 고양시와 지리적으로 서울시와 경기남부의 길목에 위치한 과천시까지 연결됨에 따라 수도권으로 본격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시는 기대한다.  서울 외 지역 기후동행카드 이용 가능 도시철도 구간 [이미지=서울시] 서울시와 고양시, 과천시는 지난해 2~3월 기후동행카드 참여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후 후속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고 11월 30일 고양시(3호선·경의중앙선·서해선), 과천시(4호선)의 기후동행카드 참여를 확정지었다. 관계기관들과 함께 시스템 개발·최종 점검을 완료했다. 이번 확대로 3호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역에서 서울시 송파구 오금역까지 모든 역사(44개)에서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경의중앙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역에서 구리시 구리역까지 34개 역사, 서해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역에서 서울시 강서구 김포공항역까지 7개 역사, 4호선은 남양주시 진접역에서 과천시 정부과천청사역사까지 34개 역사에서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현재 기후동행카드 서비스 범위에 이미 고양시를 경유하는 서울 시내버스 28개 노선과 과천시를 경유하는 6개 노선이 포함돼 있음을 고려하면 서울과 고양·과천을 통근·통학하는 약 17만 시민의 이동 편의가 더욱 증진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이용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과천·고양 등 시민들도 기후동행카드의 다양한 문화 혜택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 과천시 4호선 확대로 대공원역도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만큼 방문 시 서울대공원 50% 할인 등 혜택을 참고하면 된다.  기후동행카드는 올해 1월 23일 서비스 시작 이후 70일 만에 100만 장이 팔리는 등 시범사업 단계부터 큰 호응이 확인된 바 있다. 7월부터 본사업에 들어가면서 청년할인권·관광객을 위한 단기권 등 다양한 혜택이 더해졌다. 평일 최대 이용자가 65만명이 넘어가는 등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고양·과천 지하철 적용을 시작으로 수도권 시민들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관련 협의·시스템 개발 검토를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향후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확장을 위한 타 경기도 지자체와의 논의 역시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된다고 시는 덧붙였다.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하려면 안드로이드 기반 휴대전화에서 '모바일티머니' 앱을 무료로 다운받아 충전하면 된다. 실물카드는 서울교통공사 1~8호선 고객안전실, 지하철 인근 편의점 등에서 구매한 후 서울교통공사 1~8호선, 9호선, 신림선·우이신설선 역사 내 충전기에서 권종을 선택·충전 후 사용할 수 있다.  기후동행카드의 고양시, 과천시 확대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고양시(031-909-9000), 과천시(02-3677-2285),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윤종장 서울시 교통실장은 "김포·남양주·구리에 이어 고양·과천 확대로 경기도 동서남북 주요 시군까지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대중교통 혁신이 이어지고 있다"며 "교통비 절감·생활 편의·친환경 동참 등 일상 혁명을 수도권 시민들까지 누릴 수 있도록 수도권 지역 서비스 확대·편의 향상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kh99@newspim.com 2024-11-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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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 시흥R&D캠퍼스 첫 방문 [서울=뉴스핌] 김아영 기자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해 5월 공식 출범한 한화오션 사업장을 처음 찾았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20일 '한화오션 중앙연구원 시흥R&D캠퍼스'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김승연 회장(가운데)이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를 방문해 임직원들과 오찬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한화그룹] 현장을 둘러본 김 회장은 미국 등 글로벌 시장 선점을 위한 초격차 기술경쟁력 확보를 강조했다. 해양 탈탄소 시대를 선도할 그린십(Green Ship) 기술과 방산 기술 혁신으로 조선·해양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글로벌 강자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이사, 손영창 한화오션 제품전략기술원장도 참석했다. 김승연 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이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의 상업용 세계 최대 공동수조를 방문해 시연을 지켜보고 있다.[사진=한화그룹]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는 상업용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수조와 예인수조, 국내 유일의 음향수조 등 첨단 시험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해양·방산 분야 친환경 초격차 기술 개발을 선도하는 핵심 연구 거점이다. 기술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김승연 회장이 시흥R&D캠퍼스를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승연 회장은 먼저 공동수조(Cavitation Tunnel)를 방문해 연구진의 시연을 지켜봤다. 상업용 세계 최대 규모의 한화오션 공동수조는 길이 62m, 높이 21m의 대형 터널로, 최대 출력 4.5MW 모터와 3600톤의 물을 통해 최대 15m/s의 유속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선박의 추진력을 높이고 수중 방사 소음을 줄이는 연구 성과는 함정의 은밀성과 생존성을 강화하는 방산 기술 개발에도 활용되고 있다. 예인수조를 방문한 김 회장은 임직원들과 함께 수조 내 모형선을 끄는 예인전차에 탑승해 고품질 선박 성능 시험을 참관했다. 한화오션의 예인수조는 길이 300m·폭 16m, 담수량 3만3,600톤으로 세계 최대 규모 최신 시설을 자랑한다. 상선, 함정 등 다양한 선박의 저항, 운동, 조종 성능 등에 맞춤식으로 시험할 수 있다. 김승연 회장이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 예인수조를 둘러본 후 임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한화그룹] 김 회장은 이 날 임직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여러분은 한화그룹의 자산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자산"이라며 "대한민국의 국익과 국격에 기여한다는 뜨거운 사명감을 갖고 연구에 임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더 밝게 빛날 한화의 미래에 조선해양 부문이 가장 앞에 서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한화 가족 모두는 우리 그룹의 일원으로서 함께 나아갈 한화오션의 미래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과 기술 역량으로 새 시대를 선도해 나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승연 회장은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동일한 형상으로 축소된 프로펠러 모형을 제작하여 다양한 성능을 예측·평가하는 모형제작워크샵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이곳에서 김승연 회장은 한화오션이 수출형 모델로 독자 개발한 2000톤급 잠수함 모형에 'K잠수함 수출로 글로벌 No.1 도약을 기원합니다'라고 적고 친필 서명하며 해외 수출 성공을 기원했다. 한화오션의 2000톤급 잠수함은 현존하는 디젤 잠수함 중 최고로 평가 받는 장보고-III 플랫폼에 기반해 자체 개발한 중형급 잠수함으로 최신 기술과 다양한 요구사항을 적용한 모델이다. 김승연 회장은 직원 식당에서 임직원들과 오찬도 함께 했다.  김승연 회장이 한화오션 시흥R&D캠퍼스를 방문해 임직원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한화그룹] 김 회장은 이 날 한화오션 임직원들에게 "한화는 여러분들이 마음껏 연구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파제가 될 것"이라며 굳건한 신뢰의 뜻을 전했다. 한화오션은 시흥R&D캠퍼스의 첨단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해양 솔루션을 개발하고 미래 해양 산업의 변화를 주도하는 글로벌 오션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도약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갈 예정이다.  aykim@newspim.com 2024-11-2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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