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반도체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자동차업 포기"
[서울=뉴스핌] 김선엽 기자 =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23년 전인 1997년 이미 전기차 시대와 무점포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이 회장은 97년 7월 출간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오늘 날 자동차는 부품 가격으로 볼 때 전기전자 제품 비율이 30%를 차지한다. 물론 누구도 자동차를 전자제품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내에 이 비율은 50% 이상으로 올라갈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과연 자동차인지 전자제품인지가 모호해진다. 그때 가면 아마 전자 기술, 반도체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자동차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서울 로이터=뉴스핌] 이영기 기자=지난 2011년 1월 당시 이건희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부인과 딸들과 함께 라스베거스 CES에 참석하고 있다. 2020.10.25 007@newspim.com |
본격적으로 '자동차=전자제품'이라는 발상이 보편화 된 것은 고인의 예측이 나온지 한참 지난 2015년 CES이다.
그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는 국내 현대차를 비롯해 메르세데스-벤츠와 폴크스바겐, 도요타, 포드 등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들이 대거 참가했다.
이들 완성차 업체들은 '스마트카'로 불리는 신개념 자동차를 선보였다. "자동차가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현대차를 필두로 해 완성차 업체들은 하나같이 전기차와 자율주행에 거침없이 뛰어 들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반도체 및 인포테인먼트, 차량용 디스플레이 등 전장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 중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2000년 천안사업장 2차 전지 공장을 준공하고 2차전지 사업의 닻을 올리기도 했다.
이 회장은 또 코로나19 시대를 예측이나 한 듯 1997년 이미 무점포 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이 도심에 있는 높다란 빌딩에 출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신입사원이 채용되면 으레 책상과 의자 그리고 사무집기 세트를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굳이 사무실에 개인별로 책상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최소한의 공동작업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다. 실제로 직장에 출근하지 않고도 집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재택근무를 흔히 볼 수 있고, 심지어는 해외출장 도중에 떠있는 비행기 속에서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사무실이 필요없는(Officeless)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의 시대가 열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듯 글 곳곳에 정보화 이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이 녹아 있다.
이 회장은 "이미 배달주문만을 취급하는 음식점도 생겨나고 있으며 통신판매 전문업체도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바야흐로 무점포(Storeless)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에세이를 통해 기술 천시의 한국 사회 문화를 질타하기도 했다.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발언도 기술 강국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 말이다.
이 회장은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이 되고 법관이 되기보다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독한 과학자의 길을 가겠다는 어린 새싹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또 자체 기술 개발만 고집하지 말고 기술 도입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M&A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외 기업의 우수한 기술을 사들이자는 주문이다. 여기에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이 회장은 주문했다. 글로벌 M&A가 횡횡하는 지금의 트렌드를 이미 십수년 전에 예측한 셈이다.
이 회장은 "기술자는 자존심을 먹고 산다. 그 자존심의 대가가 바로 기술료다. 기술을 조금이라도 더 얻고 제대로 배우려면 기술료를 제대로 주고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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