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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헌 교수의 더블린 서신] ④영국의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독립 투쟁

기사입력 : 2023년02월02일 08:00

최종수정 : 2023년03월30일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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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창간 20주년 특별기고

목헌 트리니티대 교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가장 중심 대로는 오코넬가 (O'Connell Street)라 할 수 있다. 이 곳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아일랜드 중앙우체국인데, 1916년 4월의 부활절 항쟁 (Easter Rising)이 벌어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 교회력으로 당시 부활절 주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명명된 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500 여명의 사망자와 2000여명의 부상자의 피로 더블린 시내 거리를 물들인 참극이다.

아일랜드 역사의 벡터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새로이 설정되는 순간이었다.

1916년은 영국과 프랑스 등 몇몇 국가들이 독일과의 1차 세계 대전을 한창 치르고 있던 때였다. 영국 의회에서는 아일랜드에 약속 했었던 자치령이 전쟁을 빌미로 무기한 연기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가들은 많은 대화와 치밀한 준비를 통하여 약 1200여명의 자원 병력을 동원, 더블린 시내의 대여섯 장소를 장악했다. 항쟁 본부격인 중앙우체국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하게 된다.

[목헌 교수의 더블린 서신] 글싣는 순서

1. '감자농사' 빈국서 1인당 명목GDP 세계 2위로
2. 대기근으로 인구 3분의 1 잃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잘사는 비결
3. 더블린 산책과 함께 하는 역사 기행
4. 영국의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독립 투쟁
5. 아일랜드 글로벌 최저 법인세의 두 얼굴
6. 아일랜드의 세계 최고 기업들…기네스맥주에서 의료기기까지
7. 아일랜드 교육의 백미...중고생에 숨통 트여준 전환학년제
8.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평화로 (上)
9.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평화로 (下)
10. 한·아일랜드의 디아스포라와 재외동포 역량
11. 골칫덩이 국가에서 유럽의 실리콘밸리로...위기극복 DNA 채워진 아일랜드 (끝)

때는 4월 24일, 부활절 다음날 월요일이었다 (Easter Monday).

이 날 인근 통신소를 탈취한 독립운동가들은 모스 부호로 세계 만방에 아일랜드 공화국 선포를 알리는 전보를 띄웠으며, 이는 아일랜드 최초의 방송으로 기록되었다.

1916년 독립항쟁 직후 파괴된 더블린 시내 모습. [사진=목헌 교수]

민족 자존을 만방에 공포한 세계 도처 190여 나라의 독립선언문 가운데 미국의 독립선언서 (1776),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그리고 우리와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소중한 기미 독립선언문 (1919)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정치·종교 차별 거부하고 남녀평등 명시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선언문은 남녀의 평등을 대문자로 명시하고 (아일랜드의 선언서는 'IRISHMEN AND IRISHWOMEN'으로 시작한다), 아일랜드 섬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차별을 완강히 거부하는 내용으로 주목받을만 하다.

또 국가의 소유는 어느 왕권 또는 소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 전체에게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함께 항구적인 국가와 정부의 수립을 위해서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민주적인 절차가 이루어져야 함을 명문화한 아일랜드 독립선언문은 매우 강렬하고 수려한 문체로 간결하게 써내려갔다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 선언문을 기초한 이들의 진정성 있고 순수한 민족애다. 선언문의 말미에는 일체의 가식과 교만과 권위주의가 섞여 있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는 부분도 담겨있다. 바로 "참여하는 그 어떠한 구성원도 비겁함이나 비인도적인 행위, 약탈로 우리의 명분을 더럽히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 역사적인 순간, 용맹과 규율 그리고 공익을 위해 희생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아일랜드 민족은 그 엄위한 운명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한 대목이다.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의거가 스스로의 주관적인 정당성 주장보다는 후대와 후손들의 냉철하고도 엄중한 평가를 통해서만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린다.

2016년 아일랜드 독립 선언서 공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필자가 몸담고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서는 영문으로 쓰여진 독립 선언서를 20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1916년 아일랜드 부활절 항쟁 당시의 독립선언문을 트리니티대학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사진=목헌 교수]

프랑스어와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국제 통용어는 물론 고대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의 학술적인 언어가 포함됐다. 특히 한국어로도 번역됐는데 이 과정에 참여한 필자는 아일랜드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과정에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지혜와 헌신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나무가 꽃 좋고 열매가 많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깊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인데, 씨앗이 잘 자라도록 깊은 골을 묵묵히 쟁기질하는 농부의 역할을 맡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가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튼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간파한 영국 정부는 계염령을 선포하고 닷새에 걸쳐 항쟁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곳곳에 1만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처했다. 그리고 독립군이 근거지인 중앙우체국 본부에서 총으로 항거하는 상황에서 영국군은 대포를 동원해 공격을 가했다. 우체국 돌 기둥 등이 파괴되고 무너져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명분보다 형제 자매의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기며 더 이상의 시민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원했던 항쟁군은, 4월 29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고 평화가 다시 되찾아 왔을 때의 오코넬 가는 성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항복 직후 항쟁 지도자들은 물론 많은 참여자들까지도 속속 체포가 되어 그 수가 3000여명에 이르렀다.

부활절 항쟁 지도자를 가두고 수 주 후에 총살형을 수행한 킬메인함 형무소 (Kilmainham Gaol).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1993)>, <보리를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 <패딩턴 2, Paddington 2 (2017)> 등 많은 영화를 촬영한 현장이기도 하다. [사진=목헌 교수]

워낙 치밀하면서도 비밀리에 준비되었던 거사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대부분의 더블린 시민들은 처음에는 항쟁 지도자들의 체포를 지지하였다. 그들의 삶의 근거였던 상점들이 폐허가 되고 사상자 중에 그들의 가족 친척 손님 및 거래선이 포함되다 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런 여론이 더블린 언론을 통하여 전해지자 대담해진 영국군 지휘부는 항쟁 지도자들에 대한 군법 재판을 열어 독립 선언서 서명자 7인을 비롯하여 총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상소가 더 이상 불가능한 군법 재판을 받은 이들은 킬매인함 형무소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가족과는 이별, 민족과는 최후의 작별 서신들을 남긴다.

총상 입은 노조지도자 밧줄 묶어 처형하자 여론 들끓어

총살형 집행은 5월 3일 부터 12일까지 이어졌으며, 처음에는 이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었던 더블린 시민들의 마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불사른 각각의 스토리들이 언론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특히 마지막 날에 사형당한 노조 지도자 존 코넬리 (John Connelly)의 마지막 순간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중앙우체국에서 항쟁을 지휘하다가 발목에 총상을 입는 바람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코넬리를 영국군은 밧줄에 묶어 총살형을 집행했다. 이 소식이 온 아일랜드에 전달되자 국민 모두가 침략 국가 영국의 무자비함에 이를 갈았다. 

콘스탄스 메르케비츠 백작 부인. [사진=목헌 교수]

중앙우체국 건물에서 발을 옮기기 전 소개해야 할 한 사람이 떠올랐다. 콘스탄스 마르케비츠 백작 부인 (Countess Constance Markiewicz)이다. 여성 독립 운동가이자 독립 정부 수립 후 아일랜드의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던 마르케비츠는 1916년 부활절 항쟁 직후 체포된 지도자들 중의 하나다.

그는 본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성이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나를 법에 따라 총살형을 집행할 예절도 없느냐"고 항의한 그는, 종신 징역형을 살던 중 이듬해인 1917년에 부활절 항쟁과 관련해 징역을 선고 받거나 구금되어 있던 모든 이들에게 특별 사면이 주어지면서 석방·복권되었다.

사회에 복귀 한 마르케비츠는 1차 세계 대전으로 신병 공급이 절실했던 영국의 병역 징집 제도에 대한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이내 바로 다시 구속됐다. 그렇지만 열렬한 지지자들의 후보 추천과 선거 운동 덕에 1918년 더블린 지역구를 대표하는 영국 하원의원으로 옥중 선출되었다.  

마르케비츠의 하원 의원 선출은 700여년 동안 존재해왔던 영국 의회 사상  최초의 여성 하원 의원이란 기록을 남겼다. 또 아일랜드는 물론 영국 민주주의 역사에도 큰 획을 긋는 일이었으며, 아일랜드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에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다시금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2016년 3월 27일(현지시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진행된 부활절 봉기 100주년 기념식. [사진=블룸버그통신]

당시 아일랜드 출신이 영국 하원 의원으로 선출될 경우, 식민지 체제 하에서 강점국의 중앙 의회에 지역구 의원으로서의 직접적인 활동을 일체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마르케비츠도 직접 영국 의회 활동을 하지 않았고, 영국 의회와의 카운터파트 대응 입법기관으로 아일랜드 내에 신설한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 의회 (도일 에이란, Dáil Éireann)에 출마해 선출됐다.

아일랜드의 도일 에이란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의정원과 유사한 지위와 기능을 했다. 마르케비츠는 이 초대 의회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며, 이 역시 유럽에서 정부 장관을 역임하는 최초의 여성으로서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걸리적거림이 없이 입을 수 있는 치마와 튼튼한 장화 차림을 하라. 그리고 가지고 있는 보석이 있다면 은행에 맡겨놓고 권총을 구입하라."

메르케비츠는 부활절 항쟁 당시 이런 말을 남겼으며 지금도 아일랜드의 중고등 학생들이 배우는 명언으로 간주된다. 

"보석 은행 맡기고 권총 준비하라" 외친 여성 독립운동가 메르케비츠

메르케비츠는 아일랜드 지주 고어-부스 (Gore-Booth)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역사 회오리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친이 고향 슬라이고 (Sligo)의 저택에서 인근 주민들에게 식량을 무상 공급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일찌기 노동자와 극빈자들을 위하여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자 했다. 신분도 성별도 구애 받음 없이 오직 민족을 위하여 그 강인한 혼과 정신을 바친 위대한 아일랜드 인이었다.

그리고 이 여성을 중용하는 아일랜드 사회의 전통은 계속되어, 대통령직을 역임했었던 매리 로빈슨(Mary Robinson, 1990-1997), 매리 맥알리스 (Mary McAleese, 1997-2011) 등 두 명의 대통령과 린다 도일 (Linda Doyle) 현 트리니티대 총장 등 훌륭한 정치가와 학자들이 맥을 잇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 대영제국에 대항한 아일랜드 국민의 독립운동은 그지없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또 결과적으로 그지없이 슬픈 항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중의 희생과 지도자들의 헌신의 열매가 맺어졌다.

이 항쟁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 의회가 생겼으며, 이를 통해서 공화국 임시 정부가 탄생했다. 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운동은 계속되었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관광명소 '기네스 스토어하우스'를 방문했다. 2020.03.03 [사진=로이터 뉴스핌]

결국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과 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유럽 내의 걷잡을 수 없는 변동로 말미암아 1922년 영국-아일랜드 조약 (Anglo-Irish Treaty) 이 체결됐다.

누가 아일랜드의 역사가 슬픔과 실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1922년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섬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서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약이 아니라, 북쪽의 6개 군(county)을 제외한 나머지 26개의 카운티 만을 독립이 가능하게 한 조약이었다. 이로 인하여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The Irish Free State)과 여전히 영국의 한 부분인 북아일랜드 (Northern Ireland)로 나뉜 분단 국가가 되었다.

정치적 분열에 부자·형제지간에 총겨누는 갈등과 내전

이 분단은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의 공화국 임시 의회 내에서도 있었다. 일단 독립을 쟁취하였으니 이를 바탕으로 향후 남북간의 통일을 이룩하자며 조약을 찬성하는 의원들과, 32개 카운티가 모두 한 국가에 포함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약 반대파로 갈라선 것이다.

더 뼈저린 일은 양 측의 의견 대립이 국민에게도 파급되어 한 마을에 사는 이웃과 이웃 사이, 한 가정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 또는 형과 아우 사이, 한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친구 사이를 갈라 놓은 이슈가 됐다. 결국 서로가 총칼을 겨누는 지경으로 추락했고, 아일랜드 내전(Irish Civil War) 이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북 간 이념갈등과 대북 문제를 둘러싼 남남갈등, 정치적 이해관계와 지역·계층 간 갈등의 심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에게도 무거운 교훈을 던지고 있다. 

이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국민의 수가 그 이전의 독립을 위하여 몸 바친 사람들의 수보다도 많았고, 실로 있을 필요도 없었고 있어서는 안 되는 국가적인 소모와 국가적인 위기가 약 10개월간 지속되었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수 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물든 역사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시 '이니스프리 호수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을 지은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916년의 부활절 항쟁이 종료된 지 얼마 안 되어 "초록이 다하는 곳 어디에서든 / 그들은 변할 것이다 완전히 변할 것이다 / 참혹하고도 끔찍한 아름다움이 탄생되었다" 라며 아픔을 노래했다.

당시에 아일랜드 지도자들에게 가해졌던 탄압과 극형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에이츠는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실패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이 항쟁으로 말미암아 아일랜드의 미래가 모두 변화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에이츠는 "고도의 예술적인 양식으로 전체 나라의 영혼을 표현한, 영감을 받은 시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아일랜드인 최초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더블린첨탑. [사진=목헌 교수]

처절했던 저항의 장소인 중앙우체국에서 채 50m 못 가서, 이 국민과 민족에게 긍정적이고도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물과 만날 수 있다. 이름하여 더블린 첨탑(Spire of Dublin) 또는 빛의 기념탑(Monument of Light)으로 불리는 높이 120m의 고조물이다. 

밝고 맑은 햇살에 빛나는 스테인레스 스틸 구조물인 이 탑은 주위의 건물들과 너무나도 큰 대조를 이룬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더블린 시민의 비난도 많이 받았으나, 이제는 세계의 도시 계획 전문가들로부터 절제의 미를 간결하게 표출하는 구조물로서 평가 받는다. 

과거에 무수하게도 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올라선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민이, 수도 더블린의 한 가운데에 세운 첨탑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나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도 2022년 유럽에서 가장 큰 경제 성장을 본 나라가 바로 아일랜드라는 보도를 접하면서 더블린 첨탑의 상징적인 의미가 새삼 와닿는다.

* 목헌 교수는 = 아일랜드에 2006년에 정착한 후 현재까지 트리니티 대학교 (Trinity College Dublin)의 생화학⋅면역학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단백질 3차 구조 연구 및 항암제 개발을 수행하고, 신약 개발 회사인 해믈리트 파마 (HAMLET Pharma, 스웨덴)의 기술 고문을 맡고 있다. 또, EU와 우리나라를 비롯한 40여개국의 산업 기술 개발을 위하여 설립한 공동 연구개발 R&D네트워크인 유레카 (Eureka)의 전문 심사 위원, ICMRBS 의 이사 등을 지내고 있다. 목 교수는 서울 대학교 약학 계열 1학년 과정을 이수한 후 도미, 버클리 대학교 (UC Berkeley) 에서 학사, 퍼듀 대학교에서 (Purdue University) 박사, CJ제일제당 종합 연구소 선임 연구원, 그리고 영국 외무성 치브닝 Chevening 장학생으로 옥스포드 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낸 바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그 실천을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꾸준히 하는 아름다운 분들을 벗삼으며, 더블린 한글 학교 발기위원장 그리고 아일랜드 한인회장을 역임하고, 수행하는 연구와 더불어 아일랜드에서의 재외 한국인의 위상 제고 및 그늘진 곳에 살며 탄식하는 아일랜드 인의 구제 활동에 몸과 마음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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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일본군 무장해제 "항복사실 모르느냐?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각 산개하면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우리 주변엔 돌격 태세에 착검한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워커 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 같은 고무관을 제독총에 연결한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본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은 분위기였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아니했다. 여의도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조여들어 왔다. 뿐만 아니었다. 타고 온 C46형 수송기로부터 한 50여m 떨어진 곳의 격납고 앞에는 실히 1개 중대나 되는 군인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 듯한 자들이 한 줄 또 섰고, 장군 몇 명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월 18일 한낮의 그 뜨거운 여의도 열기가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광복군.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비행장 아스팔트 위엔 한여름의 복사열이 그 위기의 긴장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기막힌 침묵이 십여 분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본군 고급 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걸음 씩 움직였다. 각자 산개, 조심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해 연안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누군가가 유서를 쓰던 일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상기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가 다가서자 의외로 포위망을 풀 듯이 비켜섰다. 우리는 아직 기관단총을 어깨에 멘 그대로였다. 일본군이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일본군 육군 중장을 선두로 한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조선주차군사령관 죠오쯔끼(上月良夫)였다. 쬬오쯔기는 그의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나남 사단장과 참모들을 뒤로 거느렸다. 우리도 좌우로 벌려 섰다. 쬬오쯔기가 「나니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소?)」말문을 열었다. 퍽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는 말 대신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선전 전단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힌 전단이었다. 거긴 또 우리가 이렇게 들어오게 된 사연도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 장씩 그 전단을 다른 일본군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쬬오쯔끼는 이를 받아 읽고,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 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위협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꽤 흥분되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변 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네 놈들의 천황이 이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말이 몇 번 건너 왔다 갔다. 갑자기 쬬오쯔끼는 한 일본군 대령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경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을 나와 있던 참이란 말을 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측에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 짓겠다'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다음 날 8월 19일 14:30분 여의도 기지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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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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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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