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한국 프로야구 수장인 허구연 KBO 총재는 거침이 없다. 뭘 물어보면 질문이 채 끝나기 전에 답이 나온다. 야구에 관한 한 모든 문제 전문가가 된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공부 잘하는 체육인의 원조이다. 방송 해설가 시절에도 꼼꼼한 현장 취재와 해박한 야구 이론을 곁들인 논리적인 관전평으로 인기를 모았다. 구수한 입담을 자랑한 하일성 위원(작고)과 비교가 됐다. 경남고-고려대 출신으로 정·재계에 인맥도 넓다. 야구뿐 아니라 스포츠계를 대표하는 스피커로 활동해왔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허구연 KBO 총재는 공식 인터뷰는 안 된다고 했다. 너무 많은 언론사가 줄을 서 있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장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얘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지난해 10월 24일 국회 문광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허 총재. leehs@newspim.com |
시즌 개막 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를 KBO 사무국이 있는 서울 강남구 야구회관에서 만났다. 기자는 허 총재와 35년간 수백 번은 만난 사이. 그는 "공식 인터뷰는 안 된다. 먼저 만나자는 언론사가 줄을 서 있다"면서도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민감한 사안 가릴 것 없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허 총재는 개막을 준비한 지난달부터 하루도 쉬어본 날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고희를 넘긴 지 몇 년 됐지만 여전히 젊은이 부럽지 않은 체력을 자랑한다. 기자가 그를 만난 날은 마침 월요일이라 경기가 없는 날. 허 총재는 기다렸다는 듯 박근찬 사무총장을 비롯해 모든 팀장이 참가하는 회의를 주재했다. "독재자야 과로사하면 끝이지만, 직원들은 쉬지 못해 어떡하느냐"는 질문에 "저희는 주말과 월요일에 교대로 쉰다"는 이경호 홍보팀장의 지원 사격이 쓱 들어온다.
◆허구연의 거침없는 입
허 총재는 그동안 수없이 나눴던 야구 얘기보다 정부의 체육정책부터 꺼냈다. 그러면서 대뜸 분통을 터뜨렸다. "전임 총재들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현장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주위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살짝 위험 수위로 흘러가는 대화. 허 총재는 지난해 프로야구 개막전 때 대구구장을 찾아 시구를 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서도 거침없이 쓴 소리를 쏟아냈다고 했다.
"저야 뭐 어려워 할 이유가 없잖아요.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40여년이 됐는데 아직도 각 구단이 회계장부상이 아닌 실제로는 연간 몇 백억씩 적자가 난다고 말씀 드렸더니 대통령께서 깜짝 놀라며 그런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친 김에 최고 인기구단인 LG와 두산이 잠실구장 마케팅으로 1년에 가져가는 수익이 집 주인인 서울시에 운동장 사용료, 전기세, 주차비 등을 내고 나면 전체 약 150억 원 중 고작 몇 억 원 남짓밖에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죠."
각종 규제에 묶여 각 구단이 전용구장을 보유하기는 고사하고 임대구장조차 불평등 계약을 맺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지적이다. 허 총재는 "프로가 이 지경인데 아마 스포츠는 어떻겠냐"고 했다. 또 "이 대로면 한국 야구가 일본을 이기는 것은 영원히 힘들다. 잘못된 체육정책이 초래한 결과"라고도 했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4월 1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기 위해 허구연 KBO 총재로부터 공을 건네 받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
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스태프들에게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이지 지난해 말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에리사 전 태릉선수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가 출범할 때 허 총재는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당시 용산 비서실에서 허 총재를 꼭 집어 지명했다는 후문이다.
허 총재는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가 체육계의 반발로 여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여러 부처에 나눠져 있는 스포츠 관련 업무를 하나의 컨트롤 타워로 통합 관리함으로써 체육정책의 일관성과 집행력을 갖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갈등을 봉합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시리즈 유치 뒷얘기
허 총재의 거침없는 언행은 변화를 이끄는 추진력이지만, 가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난달 사상 처음으로 국내에서 열린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미국프로야구 서울 개막전을 유치했을 때도 여러 말이 나왔다. 총재가 메이저리그만 챙기는 친미파다, KBO리그 개막을 앞두고 지장을 초래했다는 식이다.
허 총재는 "워낙 말이 많은 동네이니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시리즈 유치의 당위성과 어려움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한탄했다. 지난해 8월 허 총재는 "일본은 이미 메이저리그 개막전을 5번이나 유치했는데 한국은 한 번도 없다"며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설득했다. 한국은 중계권료, 티켓 파워, 구장 컨디션 등에서 일본에 상대가 안 된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메이저리그 선수협회를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번 서울시리즈엔 다저스의 오타니 쇼헤이, 야마모토 요시노부 등 일본 출신 두 슈퍼스타가 도쿄돔이 아닌 고척돔에서 첫 선을 보일 수 있게 됐다.
허 총재는 오히려 정치인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응원해주는 편이라고 했다. 서울시의회 의원들은 서울시의 이해당사자이지만 잠실구장의 사정을 허 총재로부터 듣고는 공감했다고 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도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허프라로 불러주세요"
허 총재는 자신의 여러 별명 가운데 '허프라'를 가장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그의 개인 홈페이지 타이틀은 '허구연의 허프라'다. 야구 인프라를 개척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는 허구연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허구연 총재의 개인 홈페이지 초기화면. [사진=허구연 홈페이지] 2024.04.03 zangpabo@newspim.com |
허 총재는 "올해 1000만 관중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프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 부산 인천에 대구 정도가 팀당 100만 명 입장이 가능한 구장을 갖고 있다"며 "한화가 요즘 잘 나가지만 1만2000석 구장으로 홈 72경기 전석 매진의 기적이 일어나도 86만4000명밖에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허 총재는 "스포츠는 문화이기에 앞서 산업이다"라고 강변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총리실 산하에 있어 옥상옥으로 군림하고, 매출 총량제 등 각종 규제로 엄청난 돈이 해외 베팅사이트로 유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가 KBO 총재이기에 앞서 평생을 바쳐온 체육인으로서 한국 스포츠 전반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야구계가 허구연을 불러낸 속사정은?
허 총재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람이다. 선수 생활은 짧았지만 화려했다. 1972년 고려대 최초의 1학년 4번 타자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뒤에는 1978년 채널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동아방송에서 마이크를 잡았고,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최초의 연봉제 직업 해설가가 됐다.
1985년 말에는 34세의 나이에 코치도 거치지 않고 최연소 프로야구 감독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청보에서 한 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15승 2무 40패의 흑역사를 남긴 채 퇴장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그는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스포츠 음성 정보 서비스 업체를 창업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야구인 출신 최초로 한국야구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허 총재는 그에게 부여된 실무형 타이틀에 맞게 변화를 위한 속도전을 벌여왔다. 지난 겨울 3년을 더 책임질 총재 연임에 성공하자 로봇 심판으로 불리는 자동 투구판정 시스템(ABS)을 세계 최초로 1군 리그에 도입했다. 시범 운영 중이긴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투수가 공을 던져야 하는 피치 클록 도입을 점검 중이다. 베이스 크기를 확대하고, 수비 시프트를 금지하는 등 규칙 변경에도 손을 댔다.
허 총재는 "일본 대표팀인 사무라이 재팬의 스케줄이 꽉 차 있어 쉽지는 않다"면서도 "야구 한일전 유치도 계획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정·재계의 어마어마한 인사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KBO 총재 자리를 그가 어떻게 오를 수 있었고, 또 연임에 성공했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구계가 위기를 느꼈고, 변화를 바랐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허구연 2.0 시대에 많은 사람의 눈길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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