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외교 성과 '퇴색' 의식해 소극적
라인야후 사태의 본질은 경제 아닌 안보
한국을 '안보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일본
'경제안보 시대' 외교부 역할 재점검 해야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일본 총무성이 네이버와 일본 소프트뱅크 합작인 라인야후에 처음 행정지도 조치를 내린 것은 지난 3월 초다. 일본 정부는 4월 16일 2차 행정지도를 통해 7월 1일까지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행정지도라는 후진적 '관치'의 방식으로 우방국 기업의 지분 매각을 압박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당연히 정부는 사태 초기에 적극 대응했어야 했다.
강인선 외교부 2차관은 지난 17일 주한 일본대사관의 총괄공사를 불러 "일본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우리 기업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조치가 있어서는 안된다"며 일본 정부의 관심과 주의를 당부했다. 외교부가 앞으로 이번 일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것인지, 그동안 입 다물고 있다가 여론의 압박에 못이겨 마지못해 움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일의 주무 부처는 외교부라는 것, 그럼에도 외교부는 이번 사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다는 것, 그리고 대응도 늦었다는 것이다.
사태 초기에 정부는 "네이버 측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여론의 관심이 커지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10일 일본 정부에 유감을 표시하고 "정부는 우리 기업이 해외 사업, 해외 투자와 관련해 어떤 불합리한 처분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도 지난 13일 "우리 기업의 의사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당사자인 네이버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행정지도라는 형식으로 개입한 이상 이 문제는 이미 기업 간 '비즈니스'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일본 정부가 행정지도를 내렸을때 외교부는 즉각적으로 일본 외무성과 외교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어야 한다. 하지만 외교부는 대통령실과 과기부가 이 문제에 입장을 내놓을때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외교부가 라인야후 사태에 소극적인 것은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기조와 관련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의 최대 갈등 요인이었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정부 주도로 해결하고 대일 외교의 문을 연 것을 최대 외교 업적으로 꼽는다. 실제로 한일관계 정상화는 한·미 동맹 강화와 한·미·일 협력의 기본 토대가 됐다. 미국이 윤석열 정부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외교의 기초인 한·일 관계는 실상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다. 강제동원 문제의 매듭을 풀지 않고 잘라버리는 졸속적 방법으로 문제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다. 일본의 태도 역시 달라진 것이 없다.
한·일 관계에 악재가 불거질때 마다 윤석열 정부는 정면 대응을 피해왔다. 최대 외교 업적이 퇴색하고 한·미·일 협력의 기초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 독도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국민들이 납득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일본 군마현이 '강제동원 조선인 추도비'를 철거해 산산조각 냈을 때도 외교부는 "이번 사안이 한·일 간의 우호관계를 저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냈을 뿐이다.
이번 라인야후 사태에 대한 대응 역시 한·일 관계를 어색하게 만드는 일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기본 자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통령실이 이번 사태에 대한 국내적 반응을 두고 "반일을 조장하는 정치 프레임은 국익을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한·미 동맹 강화와 한·미·일 협력을 위해 일본과의 갈등을 서둘러 봉합한 것이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라인야후 사태는 조태열 장관 취임 이후 외교부가 줄곧 강조해왔던 '경제안보 융합외교'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줬다. 라인야후 사태는 '경제안보 융합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럼에도 외교부가 이 문제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언행의 모순일뿐 아니라 책임 회피다.
라인야후 사태는 경제 문제이기 이전에 안보의 문제다. 일본이 라인야후의 지분 매각을 압박하는 것이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다. 일본은 공공 인프라의 성격을 갖는 자국의 대표적 플랫폼의 서버가 한국에 있고, 한국이 사실상 라인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일본은 한국이 중요한 협력 파트너라고 말하면서도 안보상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2019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때도 비슷한 행태를 보인 적이 있다.
조 장관은 줄곧 경제와 외교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조 장관은 취임하자 마자 기업인들을 가장 먼저 만났다. 해외 출장 중에도 현지에 진출한 기업의 애로 사항을 청취했다. 해외 공관이 기업의 영업사원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경제인들을 만나고 기업 지원책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번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경제안보 융합시대'는 안보에 방점이 찍혀 있는 개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제 경제도 안보가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안보가 그만큼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이번 라인야후 사태뿐 아니라 반도체, 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것도 미·중 전략경쟁 격화로 안보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서 외교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조 장관은 "외교부도 경제부처"라고 강조하지만, 외교부는 경제부처가 아니다. 기업의 경제활동을 외교로 지원하는 부처다. 경제부처가 해야 할 일을 외교부가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외교부가 해야 할 일을 경제부처가 대신 해주지도 않는다. '경제와 민생을 위한 외교'라는 슬로건은 외교부가 국민들의 민생을 직접 챙기라는 뜻이 아니라 국민들이 안보에 대한 불안을 덜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외교적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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