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초량동에서 2남 2녀 중 차남, 아버지는 마도로스
부산 대동중학교 시절, 노래 잘하는 야구부 포수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이혼, 잠적, 염문설, 스캔들, 괴소문…. 우리 시대 최고의 노래꾼 나훈아를 수식해 온 단어들이다. 대부분 그의 사생활을 둘러싼 관심에서 비롯된다. 물론 가황, 고향, 추석, 황제 등등 최고의 가수였다는 걸 증명할 만한 단어도 많다. 그가 12일 '라스트 콘서트'를 열고 무대를 떠났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소신에 따라 무대를 떠난 나훈아의 삶과 노래를 몇 차례에 나누어 조명해 본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었던 부친 최영석의 집안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초량초교 시절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 학교 대표로 출전해 2년 연속으로 1등을 차지했다. 부산 대동중 시절에는 야구부에서 포수를 했다. 그때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는 야구부원으로 이름이 높았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나훈아 골든앨범 시리즈 재킷. [사진 = 예아라 제공] 2025.01.13 oks34@newspim.com |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수가 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딴따라'라는 인식 때문에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는 "가수가 되려는 꿈을 끝까지 말린다면 영도다리 밑에 풍덩 빠져 '풍덩 대학'에 가버리겠다"며 어머니를 협박해 상경, 서라벌고등학교에 다녔다.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인 이목일 화백은 나훈아를 노래 잘하는 동급생으로 기억한다. 그는 "1학년 때 우이동 골짜기로 봄 소풍을 가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는데 소풍 왔던 여고생들이 난리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집안에서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았던 나훈아는 지인의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고단한 무명 가수 도전을 시작했다. 여러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다녔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오아시스레코드 사무실에 사환 역할로 들어간 그는 회사 마루를 닦고 작곡가들에게 세숫물까지 떠다 바치는 고단한 생활을 감내했다. 영양실조에 걸릴 만큼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8년 어느 날, 녹음실에 심부름을 위해 따라갔다. 마침 그날 취입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지 않는 사고가 터졌다. 녹음실 관계자들이 농담삼아 가수 지망생인 최홍기에게 '노래 한 번 해 보라'고 떠밀어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가 시작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촌스럽고 투박한 외모의 경상도 청년이 범상치 않은 노래 실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나자 깜짝 놀란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은 즉석에서 그의 노래 취입을 전격 결정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나훈아의 애창곡 모음집. [사진 = 예아라 제공] 2025.01.13 oks34@newspim.com |
나훈아의 데뷔 연도는 기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다만 그가 카운트해 온 바로는 올해가 데뷔 58주년이 되는 해다. 1960년대 후반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훈아는 '천리길', '내 사랑', '약속했던 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을 순차적으로 녹음했다. 이 노래들이 여러 가수가 발표한 LP 앨범에 수록된 것이다. 나이도 1947년생이 아닌 1951년생이 정확해 보인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음반을 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이를 높인 듯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전쟁 직후 출생 신고가 늦어져서 주민등록상 나이가 원래 나이보다 적게 기재됐을 확률도 있다. 여하튼 나훈아는 데뷔와 함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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