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슈뢰더의 '어젠다 2010'과 노동시장 개혁
영국: 블레어의 제3의 길과 시장친화적 복지정책
새 정부 앞에 놓인 과제는 무겁고 시급하다. 고물가, 저성장, 자영업자의 한숨, 청년층의 탈출구 없는 불안, 노동시장의 양극화, 산업 전환기에서 밀려나는 중소기업들. 이 모든 현실 앞에서, 이제 막 출범한 대한민국의 진보 정권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으로 시장을 살리고, 민생의 무게를 덜며,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것인가.
유럽의 좌파 정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파적 경제정책을 과감히 채택하며 위기를 돌파해 왔다. 슈뢰더의 독일, 블레어의 영국, 포용과 유연성을 결합한 네덜란드, 그리고 복지국가 스웨덴의 좌파 지도자들조차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불편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치적 타협이 아닌, 실용과 용기의 산물이었고,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 냈다.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유럽 좌파들의 실용정책
유럽 각국의 진보정권은 지난 30년간 변화된 세계경제 환경에 대응하며 실용적 '우파적 전환'을 단행해 왔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의 사례는 이념보다 현실을 앞세운 실용전략이 어떻게 국제경쟁력을 강화시키며, 국민의식과 국가체제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독일: 슈뢰더의 '어젠다 2010'과 노동시장 개혁
2003년, 독일은 유럽 통합과 세계화 압력 속에서 '경직된 복지국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동서독 통합 비용, 실업률 증가, 제조업 경쟁력 약화가 누적되면서 사회적 긴장도 높아지고 있었다. 슈뢰더(Gerhard Schröder) 총리가 이끄는 사민당 정부는 '어젠다 2010(Agenda 2010)'과 '하르츠 개혁(Hartz Reforms)'을 통해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의 핵심은 실업급여 축소, 복지지출의 효율화, 임금 유연성 확대, 기업세 인하였다. 특히 하르츠 IV(Hartz IV) 개혁은 저소득층 대상의 실업보조금 수령 자격을 강화하고, 근로유인을 높이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당시 독일 노동총연맹(DGB)은 강력히 반발했고, SPD 내 좌파 지지층도 정치적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이 개혁이 '독일 경제의 재도약'을 가능케 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IMF의 2014년과 2015년 보고서에서 당시 이 개혁을 "유럽식 모델이 경쟁력을 회복한 가장 명료한 사례"로 평가했다 (Germany—2014 Article IV Consultation: Staff Report, IMF Country Report No. 14/216, Washington, D.C.; Germany 2015 Article IV Consultation Report, IMF Country Report No. 15/186).
2005~2010년 사이 독일의 실업률은 11%에서 5% 이하로 감소했고, 유럽 재정위기 속에서도 제조업 수출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IMF의 보고서(2015)에서는 독일의 노동시장 개혁을 "고령화 사회에 적응한 지속가능한 복지자본주의 모델"로 호평했다. 다니엘 그로스(Daniel Gros)는 CEPS 정책논평에서 "어젠다 2010은 정치적 비용을 감수하고도 구조개혁을 단행한 유럽 유일의 성공사례"라 평가한 바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이끈 독일 사민당(SPD) 정부는 2003년 '어젠다 2010(Agenda 2010)'이라는 이름의 전면적 구조개혁에 착수했다. 이는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서 출발한 조치였다. 실업급여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Hartz Reforms), 기업세 인하 등이 그 핵심이다.
당시 슈뢰더는 SPD 내부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복지를 유지하려면 고용이 유지돼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2003년 3월 16일 ARD 방송 인터뷰에서 "복지국가를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고용을 창출해야 합니다(Wenn wir den Sozialstaat erhalten wollen, müssen wir Beschäftigung schaffen)" 라고 설파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계와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였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유럽의 병자'에서 '유럽의 엔진'으로 탈바꿈했다. 2005년~2015년 사이 독일의 실업률은 11%에서 5% 아래로 하락했고, 세계 수출 1위 자리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블레어의 제3의 길과 시장친화적 복지정책
독일보다 먼저 시도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블레어의 '제3의 길(Third Way)'은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정책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이 노선은 국가의 적극적 개입 없이 시장만을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복지에 과도하게 의존한 전통적 좌파의 한계를 동시에 비판하며, 개인의 책임, 정부의 효율성, 사회적 투자 개념을 강조한다. 기든스는 『The Third Way: The Renewal of Social Democracy』(1998)에서 이를 "시장과 국가, 개인과 공동체가 상호 보완하며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라 설명했다.
1990년대 말 영국은 공공부문 비효율과 경제 침체로 대처(Margaret Thacher)와 메이저(John Major)가 18년 동안 이끈 보수당의 장기집권에 피로감을 느낀 유권자들이 '혁신적 진보'를 갈망하던 시기였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는 전통적 노동당 노선을 버리고, '제3의 길(Third Way)'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워 1997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는 당시 세계화, 금융화, 디지털화라는 국제경제 환경에 대응한 전략적 노선 수정이었다.
블레어 정부는 복지축소 대신 '성과기반 복지'를 강화하고, 노동시장 유연성과 기업규제 완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특히 NHS(국민보건서비스) 투자 확대, 교육개혁, 대학의 등록금제 도입은 공공서비스의 재정 지속성과 질 개선을 동시에 꾀한 정책이었다. 또한 런던 금융허브 강화, 첨단기술 및 창조산업 육성은 글로벌 자본과 인재를 유치하는 핵심 전략이었다.
OECD의 『Employment Outlook 2004』는 "영국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복지의 연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결합한 나라 중 하나"라고 평가했고, 세계은행은 2005년 보고서에서 "블레어 정부의 경제정책은 신흥국에도 적용 가능한 복지-시장 통합모델"이라 강조하였다. 물론 노동당 내부에서는 '신자유주의 포섭'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대중의 복지에 대한 신뢰와 경제성과는 블레어 총리의 3연임을 가능케 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은 집권기간동안 영국의 좌파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복지지출은 유지하면서도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개혁, 고등교육 개방, 과학기술 투자 등을 적극 추진했다. 노동당의 시장친화적 노선은 당시 보수당의 긍정적 평가를 받았고, 1997~2007년 사이 영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안정적인 성장률과 고용률을 유지했다. 세계은행 보고서(World Bank 2008. The Growth Report)는 영국을 "공공과 민간의 조화 속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로 소개했으며, 노동당은 유권자 사이에서 '성장과 복지의 균형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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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지환 기자 =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