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중동 아랍권을 양분하는 두 강대국인 동시에 지난 수십년간 앙숙처럼 격돌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빠른 속도로 밀착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이고,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이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역사적으로 칼리프 계승 문제를 놓고 종파적 대립을 해왔고, 특히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두 나라의 갈등과 대결 양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하지만 공동의 적인 이스라엘이 주변의 여러 이슬람 세력을 힘으로 잔인하게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두 나라가 과거의 앙금을 씻어버리고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사우디와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싶어하지만 사우디는 이제 이스라엘을 '중동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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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드 빈살만(왼쪽) 사우디아라비아 국방장관이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대통령 관저에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를 만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 '12일 전쟁' 이후 향후 중동의 지정학적 구도를 재편하기 위해 새로운 '큰 그림'을 그렸다. 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 화해·공존을 위한 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발동을 걸었던 '아브라함 협정'을 다시 밀어붙여 중동 전체의 영구적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지난 2020년 8~9월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재한 아브라함 협정으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이후 순항을 하면서 사우디의 합류도 가시권에 뒀지만,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가자 전쟁 발발로 무산됐다.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이 가혹한 보복 공격으로 가자지구를 초토화하고 수 많은 인명 피해를 양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대량 학살을 벌이고 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FT는 "빈살만 왕세자는 가자 전쟁을 기점으로 이란과의 화해를 가속화했고, 사우디의 (외교·안보) 계산이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사우디 내부를 잘 아는 한 소식통은 "사우디는 앞으로도 이란과의 화해 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며 "걸프만 바로 건너편에 큰 이웃을 두는 것은 현명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의 마음을 이란 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울게 만든 계기는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이란 폭격이었다.
사우디는 이스라엘이 계속 전선을 주변으로 확대하는 상황에서도 이란과의 충돌만은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중동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4월에는 살만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자신의 아들이자 국방장관인 칼리드 빈살만(37) 왕자를 이란에 급파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 협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사우디 왕실 고위 인사의 이란 방문은 20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사우디의 노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란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FT는 "사우디는 과거에 가자지구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이 지역 안정을 해쳤다고 봤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본다"고 했다.
빈살만 왕세자는 최근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있고, 양국의 국방 수장들은 최근 지역 안보·안정 유지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한편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지역 왕정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무자비하고 궤멸적인 공격이 아랍권 내 이슬람 젊은이들을 급진적 사상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대 국가이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대량 살상하는 이스라엘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이슬람 근본주의 주장이 빠르게 젊은층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수교를 하겠다는 마음을 접었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 외교안보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바레인 주재 중동 정책 선임연구원인 하산 알하산은 "사우디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로 인해 겪게 될 평판 손실은 엄청 클 것"이라며 "국내는 물론이고 중동 지역과 이슬람 문화권 내 리더십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FT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사우디와의 관계 정상화를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사우디 내부에서 그에 응해줄 파트너가 아직도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군사적으로 많이 약해졌고, 하마스·헤즈볼라 등 대리세력을 지원할 여력도 없어졌다는 점도 사우디가 이란을 좀 더 포용적으로 대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 워싱턴DC에 있는 중동연구소의 방문학자 그레고리 고즈는 "지금의 이란은 한마디로 몇 년 전의 이란이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