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정치 국회·정당

속보

더보기

[최연혁 교수의 정치분석] ⑦웨스트민스터 의회 담론과 설득의 질 ⑴

기사입력 :

최종수정 :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AI 핵심 요약

beta
분석 중...
  • 영국 하원 1807년 2월 23일 노예 무역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 윌버포스 등 찬성파가 도덕·정책 문제로 주장하고 반대파가 경제 충격을 반박했다.
  • 283대16 표결로 세계 최초 노예 무역 폐지 결정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한사드 기록 1권(1803-1820)에서 찾아낸 영국 논쟁, 세계 최초 노예 무역 제도 폐지 찬반 토론

1807년 2월 23일은 영국 하원에서 노예 무역 금지 법안("Slave Trade Abolition Bill")이 통과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고 있다. 이 날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세계 최초로 노예 무역 금지가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1780년대 말부터 꾸준하게 형성된 폐지 운동이 의회 안으로 들어와 반복적으로 반대 논리와 이해관계가 부딪치며, 마침내 대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기도 하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한 의원의 연설에서 시작된다. 1789년 5월 12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의원은 하원 연설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젓다가 병에 걸려 쓸모가 없어지면 바다에 비참하게 내던져지는 노예들의 실상을 4시간에 걸쳐 열변을 토했다. 요안 그리피드(Ioan Gruffudd)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2006)에서 보여준 윌버포스의 연설은 단지 감성적 호소가 아니라, 무역선 선원 출신들의 증언에 근거한 사실에 근거한 보기 드문 영국의 명연설로 꼽힌다.

1807년 영국 의회를 통과하며 대서양 노예 무역을 법적으로 금지한 '노예 무역 폐지법(Slave Trade Act 1807)'의 공식 문서. [사진=영국 국립기록보존소(The National Archives, UK) / Public Domain]

하지만 역사학자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가 쓴 자본과 노예(Capitalism and Slavery, 1944), 그리고 18세기 영국 의회 보고서(Parliamentary Papers)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 등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도시 인구의 8분의 1 이상이 노예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야유를 보내며 반대하는 도시 자본가와 지주, 그리고 귀족 의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807년 2월 23일 웨스트민스터 하원 회의록은 이 역사적 현장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노예 무역 폐지 법안("Slave Trade Abolition Bill")의 찬반 측은 두 축으로 나뉜다. 한편에는 법안을 지지하는 정부 소속 의원들이고, 반대편에는 식민지 이해관계와 경제적 충격을 근거로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펼치는 야당 소속 의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당대의 정당 구도는 오늘날처럼 양당 제도로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휘그(Whig)와 토리(Tory)의 전통적 균열선과 개인적 연합, 정부 구성의 다양한 변화가 섞여 있는 형태였다. 그럼에도 대체적인 흐름에서 법안을 적극적으로 끌고 간 쪽은 휘그 계열 정부를 중심으로 한 폐지파였고, 반대 측은 서인도 플랜테이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보수적 의원들과 경제적 충격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 역사적 토론은 로드 하윅(Lord Howick) 당시 휘그(Whig) 당 소속 의원의 반대 연설로 시작된다. 그는 18년이나 된 핵심 법안임을 지적하며 찬성을 표명한다.

"노예 무역 금지에 관한 법안은 이미 오랫동안 충분히 논의되었다"("This question has been so long and so fully discussed…")

이 한 문장은 그날 토론의 성격을 명확히 정리해 준다. 매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재상정되는 이유는 의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며, 이제는 결론을 내야 할 때가 왔다는 압력인 셈이다. 또한 노예 무역이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노예 무역은 원칙에 있어 부정의하며, 둘째, 결과에 있어 정책적으로도 잘못되었다"("The trade is unjust in its principle, impolitic in its effects")

이 대목에서 "정책적이다 잘못되다"(impolitic)는 표현은, 찬성파가 단순히 도덕을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 이익과 통치의 정당성까지 함께 문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석에서는 곧바로 "옳소!"(Hear, hear) 같은 반응이 따랐다.

1787년 조시아 웨지우드가 제작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상징적 메달리온. "나는 사람이 아니며 형제가 아닙니까?(Am I Not a Man and a Brothe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소장 / Public Domain]

한사드는 이렇게 회의장의 분위기를 장황하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이런 짧은 표현을 통해 발언의 어느 지점에서 동의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말에서 의사당 내 소란이 일어나는지, 의장은 어떻게 의사 절차를 관리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반대 진영은 즉시 '재산'과 '보상'의 문제를 들며 반론을 펼친다. 노예 무역이 부정의하다는 주장 자체를 정면으로 옹호하기보다, 의회가 법으로 금지 조치를 취할 때 그 결과가 경제와 식민지 질서에 미칠 충격을 묻는 방식이다.

"서인도 제도 소유자들의 재산이 이 법안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The property of the West India planters is deeply involved in this measure")

같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이다. 다른 논거도 등장한다.

"보상 없이 이처럼 중대한 이해관계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Is it just to sacrifice so great an interest without compensation?")

이 질문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의 호소라기보다, 당시 영국 정치에서 재산권이 헌정 질서의 중요한 축으로 이해되던 관념을 겨냥한다. 법이 도덕을 구현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재산권과 계약의 세계를 어떻게 흔드는지, 의회는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묻는 셈이다.

이런 발언에 대해 일부 의석에서 다시 "옳소!"(Hear!)로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한사드가 모든 발언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주지는 않지만, 때때로 발언 방해(interruption) 같은 표기가 등장하는 지점은 논쟁이 과열되었음을 시사한다.

토론이 과열되거나 서로 고함으로 의사당이 소란할 때, 한사드 기록에는 의장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질서!"(Order!)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의장은 토론의 방향에 개입하기보다, 발언 순서와 표현의 한계를 결정하고, 논쟁이 절차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1807년 논쟁에서도 의장은 때때로 "질서!"를 선언하며 의원들이 상대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 장내를 한 순간에 제압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사드의 "질서!"가 어떤 소설적 분위기 묘사를 대신하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의장이 "질서!"를 말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때 회의장의 소란과 긴장을 암시한다.

윌버포스는 이 논쟁의 상징적 인물이며, 1807년 토론에서도 중요한 목소리로 등장한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노예 무역의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1789년의 4시간에 걸친 의회 연설 이후, 그는 회기가 열릴 때마다 이 문제를 의회가 잊지 않도록 다시 상정했고, 그 과정에서 '노예 무역'은 더는 일부 인도주의자의 관심사가 아니라 국가의 원칙과 명예를 건드리는 공적 쟁점이 되었다.

1807년의 토론에서 그가 던지는 문장은,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이미 알려진 사실 위에서 의회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하는 방식에 가깝다.

"우리는 재산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었다. 이제 정의에 대해서도 들어야 한다"("We have heard much of property; let us hear something of justice")

이 발언이 나오는 순간 의석에서는 "옳소!"(Hear, hear)로 응수한다. 이는 도덕과 정의의 언어가 단지 감상적 호소가 아니라 의회 다수의 공감을 얻는 정치적 문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반론 측의 골격이 보다 선명해진다. 반대 측은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면 제국의 안보와 질서가 위험해진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갑작스러운 폐지는 식민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The sudden abolition may produce the most fatal consequences in the colonies")

찬성 측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국가가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맞선다.

이때 찬성 측은 노예 무역을 영국의 '명예'와 연결한다. 영국이 국제 무대에서 자부해 온 문명과 법치의 기준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진=Wikimedia Commons / Library of Congress (Public Domain)]

또 하나의 흥미로운 대목은, 찬반이 단순히 두 덩어리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원들은 노예 무역을 끝내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전환의 속도와 방식"을 문제삼는다. 급격한 단절이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비극을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신중론은 찬성파 내부에서 정책 설계의 상세한 내용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촉발한다. 이때 토론은 "폐지냐 유지냐"의 단순 대결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 폐지할 것인가"라는 실행의 언어로 이동한다. 한사드가 기록하는 영국 의회 토론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립이 있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인신 공격이나 허수아비 공격(상대방의 주장하는 논점보다 비약하거나 결론을 오도하여 공격하는 오류; 예를 들어 '나는 여름비가 좋아'라고 이야기하는 아이에게, '비가 너무 와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하니?'라는 엉뚱한 공격을 하는 모순) 등으로 흐르지 않고, 두 개의 논거가 경쟁하는 형태로 토론이 유지된다.

토론 중에는 종교적 언급이 오가기도 한다. 누군가 성서(Scripture)를 근거로 예속 상태의 존재를 언급하며 논점을 흐리려 할 때, 찬성 측은 "어떤 권위도 불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No authority can sanctify injustice")와 같은 방식으로 되받아치기도 한다.

이때 의장은 다시 "질서!"(Order)를 선언하며, 논쟁이 과도한 감정적 대립이나 비의회적 표현으로 번지는 것을 제어한다. 이런 장면은 웨스트민스터 토론 문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격렬한 가치 충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충돌이 절차를 깨뜨릴 때마다 의장이 재빠르게 개입해 논쟁을 다시 '발언 가능한 형태'로 되돌린다.

1807년 논쟁의 결말은 결국 표결로 완결되었다. 논쟁이 충분히 이어졌다고 판단되면, 누군가 "표결하라!"("Divide!")를 외친다. 여기서 "표결"(Division)은 단순한 기술적 절차가 아니라, 의회가 긴 논쟁을 '결정'으로 전환하는 장치다.

논쟁의 마지막 단계는 본회의 투표 절차다. 그날 결과는 찬성 283표("Ayes 283"), 반대 16표("Noes 16")로 267표("Majority 267") 차이로 노예 무역의 금지가 선포되었다. 이 압도적 표 차는 18년 동안 이어진 논쟁의 흐름을 반영한다. 반대 의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결정을 늦출 만큼의 정치적 힘을 갖기 어려운 국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독자가 놓치기 쉬운 의미가 하나 있다. 한사드는 회의장의 분위기를 문학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누가 격앙되었다"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와 같은 문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한사드의 방식은 다른 종류의 '현장성'을 남긴다.

어느 발언 뒤에 "옳소!"(Hear, hear)가 붙었는지, 어디에서 "발언 방해"(Interruption)가 발생했는지, 의장이 몇 차례 "질서!"(Order)를 외쳤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표결"(Division)로 결론이 내려졌는지 등이 상세히 기록된다.

이 같은 표기들이 모여, 의회가 갈등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설득이 어떻게 절차와 결합해 결정을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1807년의 사례는 오랜 시간 반복된 쟁점이, 마침내 표결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 장면이다. 여론, 도덕적 언어, 정책적 계산, 재산권 논리, 제국의 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논거들이 한 공간에서 부딪치고도, 최종적으로는 절차의 문장 종결의 표현인 "표결하라!"(Divide!)에 양측이 동의해 표결로 이어진다.

영국 한사드(Hansard) [사진 = © UK Parliament (Open Parliament Licence)]

1807년 2월 23일의 토론을 한사드 제1 시리즈의 대표 논쟁으로 읽어야 할 이유는 단지 역사적 법안을 둘러싼 논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토론은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사회 갈등을 공론장으로 수렴하고, 입론과 반박의 근거를 기록으로 남기며, 최종적으로 표결로 결정을 확정하는 민주적 정수를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는 위기의 순간에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 무역 금지라는 결론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즉 수십 명의 의원들이 번갈아 가며 입론과 반론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논쟁이 과열될 때 의장이 절차를 통제하며, 찬반의 논거가 정책과 원칙의 언어로 정리되는 과정, 이 모든 절차가 의회 토론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1807년의 표결 숫자는 그래서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정치적 논쟁이 의회 절차 속에서 역사적 합의로 전환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 영국은 프랑스 혁명과 전쟁이라는 외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정부와 다수 의원들은 대륙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식민지 경제를 급격히 흔드는 결정을 주저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에 대한 비판은 점차 의회 바깥의 시민사회와 결합하며 압력을 키워 갔다. 청원 운동이 확대되었고, 종교 단체와 인도주의적 단체가 자료와 증거를 축적해 나갔다.

의회 토론은 이러한 외부의 문제 제기를 의회로 수렴하며, 점차 논거를 정교화했다. 즉각적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반복되는 회기 속에서 하나의 지속적 의제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노력이 끊이지 않았기에 1807년의 토론에서 찬성세력은 마지막 논쟁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된 이후, 상원(House of Lords)에서 다시 한 번 더 논쟁이 맞붙었다. 하지만 하원에서 형성된 압도적 흐름을 뒤집을 만큼의 반대 세력은 형성되지 않았다. 상원 내부에서도 도덕적 책임과 국가의 명예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807년 3월, 법안은 왕실 재가(Royal Assent)를 받았다. 조지 3세(George III)의 재가를 통해 노예 무역은 이제 영국 제국 전역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1807년 영국의 노예 무역 금지 선언이 프랑스, 독일, 미국, 스웨덴 등으로 퍼져 나갔다.

이 후일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원의 토론과 표결, 상원 심의와 왕실 재가라는 헌정 절차를 거쳐 제도적 현실로 이어졌다.

설득은 말로 끝나지 않고 법으로 정착되었다. 한사드에 남은 토론의 기록은 그 과정을 증언한다. "옳소!"(Hear, hear)와 "질서!"(Order), 그리고 "표결하라!"("Divide!")라는 짧은 표기들은, 격렬한 논쟁이 결국 절차 속에서 정리되고 제도화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사진=뉴스핌 DB]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김영범, 이제 판잔러 잡으러 간다 [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한국 수영에 또 하나의 '수영 대박'이 아닐까. 불과 1년 전 세계선수권 탈의실에서 중국 수영의 상징 판잔러에게 키링을 받고 기뻐하던 소년이 이제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단거리 샛별' 김영범(20·강원특별자치도청)의 성장세가 눈부시다. 김영범은 21일 일본 도쿄 아쿠아틱스센터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50m 결선에서 21초66의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이로써 전날 자유형 100m에서 판잔러와 접전 끝에 0.04초 차 아쉬운 은메달에 머물렀던 한을 풀고 생애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이번 금메달은 이번 대회 대한민국 경영 대표팀이 획득한 첫 금메달이기도 하다. [도쿄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김영범이 21일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경영 남자 자유형 50m 결선을 마친 후 기뻐하고 있다. 2026.9.21 psoq1337@newspim.com 예선부터 기세가 매섭틀렸다. 김영범은 이날 오전 열린 예선에서 21초71을 기록해 3년 전 항저우 대회에서 지유찬(대구광역시청)이 세웠던 종전 대회 기록(21초72)을 0.01초 앞당겼다. 이어 불과 몇 시간 뒤 펼쳐진 결선에서 자신의 기록을 다시 0.05초 줄이며 정점에 올랐다. 2006년생으로 한국 남자 계영 대표팀의 막내인 김영범은 전날 자유형 100m 결선에서 반환점을 1위(22초81)로 돌며 세계 정상급 스타 판잔러를 위협했다. 비록 막판 추격을 허용해 47초65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으나 세계적인 강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루 만에 아쉬움을 털어낸 그는 50m 결선에서 누구에게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으며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도쿄 로이터=뉴스핌] 박상욱 기자=김영범이 21일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경영 남자 자유형 50m 결선을 마친 후 기뻐하고 있다. 2026.9.21 psoq1337@newspim.com 김영범의 가파른 성장은 압도적인 신체 조건과 대담한 승부욕에서 비롯된다. 195㎝, 체중 90㎏에 발 크기 300㎜, 윙스팬 216㎝에 달하는 축복받은 피지컬은 폭발적인 스피드가 요구되는 단거리 종목에서 강력한 무기다. 큰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을 장착한 그는 '단거리 박태환'의 탄생을 알리며 한국 수영의 새로운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다. psoq1337@newspim.com 2026-09-21 17:49
사진
앤서니 홉킨스 음반 영국차트 1위 [서울=뉴스핌] 김용석 선임기자 = "제 삶 전체가 하나의 꿈입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로 널리 알려진 배우 앤서니 홉킨스(88)가 작곡가로 낸 첫 데카 클래식스 음반 'Life Is A Dream'으로 발매 1주 만에 영국 오피셜 클래식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라이프 이즈 어 드림' 녹음 현장의 앤서니 홉킨스. [사진= 유니버설뮤직] 홉킨스는 "평생의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명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비르투오소 솔리스트인 첼리스트 그레고리오 니에토 및 클래식 피아니스트 세르히오 티엠포와 협업할 수 있었던 것은 특권이었다"고 밝혔다. 음반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런던 알렉산드라 팰리스에서 녹음됐다. 그래미상 수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바흐 합창단과 윈체스터 대성당 소년 합창단도 참여했다. 홉킨스의 자작곡 12곡이 실렸으며 연주 시간은 1시간 7분이다. 앨범 제목에는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겼다. 홉킨스는 "이 앨범의 제목은 Life Is A Dream으로, 삶에 바치는 러브레터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긴 작별로 본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와 작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록곡은 웨일스와 가족의 기억에서 나왔다. '마르감'은 그가 태어난 포트탈봇의 지명에서 따왔고, '나의 조국'은 제빵사였던 아버지와 웨일스에 대한 헌사다. '스텔라 아리아'는 아내를, '타라'는 조카를 위한 곡이다. 홉킨스는 어린 시절과 부모, 웨일스에 대한 기억이 작품에 영감을 줬다며 "놀라울 만큼 선명하다"고 말했다. 2012년 앨범 '컴포저'에 실렸던 '마르감', '1947 모음곡', '앤드 더 왈츠 고즈 온'도 이번에 새로 녹음돼 다시 수록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홉킨스는 "모든 것이 예상치 못했지만 하나로 모였다"고 했다. 바턴은 2006년 영화 '슬립스트림' 음악 작업 이후 홉킨스와 협업해 왔고, 이번 음반에서도 여러 곡의 관현악 편곡을 함께 맡았다. 홉킨스는 두다멜에 대해 "우아하고 정밀한 지휘봉으로 각각의 음에 깊고 지워지지 않는 의미를 부여했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음반에 대한 평가도 나왔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금관 중심의 팡파르에서 우아한 왈츠까지 폭넓다고 평하며 홉킨스의 화성 감각을 높이 샀다. 로라 몽크스 데카 사장은 차트 1위 소식에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클래식 음악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은 일"이라며 축하했다. 홉킨스는 베네수엘라 국민 지원을 위해 CD와 바이닐 판매액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다. 창작 과정에 대해 홉킨스는 "제 마음의 구조는 이미지로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라며 "이것이 제 영감의 근원이다"고 말했다. 다음 계획으로는 "요즘 즉흥적으로 새 곡들을 만들고 있고, 그 곡들을 이제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발전시켜 보고 싶다. 영화음악을 작곡해 보고 싶다"고 했다. 앤서니 홉킨스의 앨범 'Life is a dream(라이프 이즈 어 드림)' 커버. [사진=유니버설 뮤직] 홉킨스는 1937년 12월 31일 웨일스 포트탈봇 마르감에서 제빵사 리처드 아서 홉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립웨일스음악연극대학을 1957년 졸업하고 왕립연극학교에서 연기를 배웠으며, 1965년 로런스 올리비에의 초청으로 영국 국립극단에 합류했다. 1987년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CBE)을 받았고 1993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92년 제6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들의 침묵'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21년 제93회 시상식에서는 '더 파더'로 같은 상을 다시 받아 83세의 나이로 이 부문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됐다. 영국 아카데미(BAFTA) 4회, 에미상 2회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작곡가로서의 이력도 길다. 1964년 쓴 왈츠 '앤드 더 왈츠 고즈 온'은 2011년 네덜란드 바이올리니스트 앙드레 류가 앨범으로 내놨고, 이 앨범은 2012년 클래식 브릿 어워즈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홉킨스는 2008년 바턴과 공동 작곡한 '마스크 오브 타임'과 '스키조이드 살사'가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초연됐다. 2012년 1월에는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 마이클 실 지휘로 클래식FM과 함께 첫 작곡 음반 '컴포저'를 냈다. fineview@newspim.com 2026-09-22 00:01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