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소련 군정은 1945년 9월 스탈린 지령에 따라 북한 단독 공산정권 수립을 확정하고 조만식 체포 후 1946년 2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 김일성은 1946년 11월부터 흑백 투표 방식의 선거를 진행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 소련은 1948년 10월 북한 정권을 공식 승인하고 슈티코프 대사를 파견해 1950년 6·25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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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소련 군정은 1945년 9월 20일부로 스탈린 지령에 따라 북한의 단독 공산정권 수립전략을 확정하고, 1945년 11월 19일 조만식을 대표하는 '북조선 5도 행정국'을 출범시켰다. 남과 북에서는 자유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자 소련 군정에서는 조만식에게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소련 군정 측 요구를 거절했다.
조만식은 반대 의사 표시로 대표직을 사직했다. 민족진영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사직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조만식은 소련 군정에 체포되었다. '남조선 반동분자와 관계, 일제와 은밀한 협력'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 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을 한편으로 하고, 자유민주주의 민족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북한 내 두 정치 세력 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소련 군정은 1946년 2월 8일 조만식이 대표로 있던 '북조선 5도 행정국'도 해산시켰다. 대체 조직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일성을 이 조직 책임자로 임명했다. 사실상의 북한 정권이 수립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김일성 계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46년 11월까지 도·시·군·면 지방 임시인민위원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김일성은 북한 단독 공산정권 수립을 위해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단위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진행했다. 모든 선거에서는 공산주의자 단일 후보에게 흑백 투표하도록 했다. 유권자의 99.6%가 투표에 참여하여, 97.1%가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정당별 비율은 북조선노동당 31.8%, 조선민주당 10%, 청우당 8.1%, 무소속 50.1%이다. 이 무소속은 전부 북조선노동당 추종 분자들이었다. 게다가 조선민주당과 청우당으로 나온 자 중에는 북조선노동당 프락치가 적지 않았다.
김일성은 곧이어 마을 단위 '인민위원회' 선거를 진행했다. 이때도 모든 선구에서는 흑백 투표로 선거했다 마을 단위 인민 위원 선출이 끝나자, 이들에 의해 중앙 정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1947년 2월 17일 공식 조직했다.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김책 등 17명으로 구성하였다.
한편 1947년 9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유엔에서 한국 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결의를 통해,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한 총선거 감시 기구인 '유엔 한국위원단'을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남한은 유엔 감시 남북 총선거를 찬성했다. 북한 정권은 이를 전면 거부했다.
유엔은 마침내 1948년 2월 25일 선거가 가능한 지역 내에서 자유 선거를 추진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3월 2일 헌법 초안을 채택했다. 이어서 남한의 5·10 총선거와 때를 같이하여 1948년 5월 1일 헌법 초안을 공식 헌법으로 채택했다. 같은 해 7월 '전 조선이 통일될 때까지 이 헌법을 북한 지역에서 실시하고, 이 헌법에 의거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결정·발표했다.
이 결정에 따라 1948년 8월 25일 북한 전역에서 소련식으로 흑백 선거하고 같은 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Korea' 성립을 선포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같은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이 있다. 김일성이 내각을 수립한 후, 1948년 9월 11일 행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언'이다. 김일성은 이 선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조선 인민의 총의로 수립하였다. 중앙정부는 단일 민주주의 국가와 조국 통일 과업을 제1차 목표로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제정한 모든 법률은 무효이고 위법이다."라고 했다. 이로써 북한 정권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소위 조국 통일이라는 허위 명분으로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었다.
소련 정부는 북한 정권이 수립된 후인 1948년 10월 12일 북한 정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이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 사람들의 통일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과 이를 지상의 과제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스탈린이 이때 사용한 '통일'이라는 말은 '평화적인 통일'이거나 '무력적인 통일'이거나 어떤 경우라도 북한 정권이 그것을 주도하라는 뜻이었다. 소련 정부가 북한 정권을 승인한 이후 다른 공산국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소련 정부는 1948년 10월 18일 전 소련 군정 군사위원이며 미·소 공동 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였던 슈티코프 장군을 초대 주북한소련대사로 임명했다. 슈티코프는 '특별군사절단'을 이끌고 1949년 1월 12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대사와 군사령관이라는 2개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슈티코프는 분명 어떤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그 특수한 임무는 바로 1950년 6·25전쟁이었다.
광복 후 우리는 세 번의 분단을 겪었다. 첫 번째는 광복 후 그어진 38선이다. 두 번째는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로 38선이 고착된 분단선으로 기능하는 순간부터다. 세 번째는 6·25전쟁으로 생긴 군사분계선이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