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오구굿 모습. |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길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단 둘이 걸어가야만 하기에 그림자마저 물기 빠진 가랑잎처럼 사무치게 헬쓱한 얼굴로 다가 오는 길이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무당의 길이 바로 그 길이다.
무당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펄럭이는 소매로 신을 모시는 사람이다. 무(巫)자는 바로 그 소매를 본 따 만들었다. 무당은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빌고, 인간에게 신의 뜻을 전한다. 무당은 신을 모시는 사제자이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자다.
무당은 강신무와 세습무로 구분한다. 강신무는 신이 내린 무당이다. 신은 신병(神病)이라는 백약이 무효이고 명의가 소용없는 병으로 내린다.
이 병에 걸리면 교회에 나가 예수님께 빌어도 보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며 병 내림을 거부해 보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다. 끝내 내림 굿을 받고 무당이 될 때 비로서 신병에서 해방된다. 신의 선택을 받음과 동시에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기막힌 신세가 되는 것이다.
세습무는 혈통으로 무업(巫業)을 대물림한 무당이다. 아버지(어머니)도 무당이었고 할아버지(할머니)도 무당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조상들도 무당이다.
인왕산 국사당은 '무당들의 경복궁'이라 불린다. 원래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남산 국사당 자리에 천황 신전을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
강신무는 한강 이북과 태맥산맥 서쪽에 많이 분포해 있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서울과 경기 북부, 강원 영서 지방이 여기에 속한다. 세습무는 한강이남과 태백산맥 동쪽에 주로 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경기 남부, 강원 영동지역이 해당된다.
시대가 바뀌었다. 유럽발 경기침체 여파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취업난이 가중되는 것 만큼 강신무의 숫자가 늘고 있는 추세란다. 오늘 내림 굿을 받은 무당이 몇 개월도 안돼 자신이 신어머니가 돼 또다른 무당에게 내림굿을 해준다.
무당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 무업계의 정설이다. 그러다 보니 제 살뜯어 먹기식 경쟁에서 탈락한 무당은 노래방 도우미로 떠 돌고 있다 한다. 무당은 굿을 할 때 무당이다. 제대로 된 굿을 할 줄 아는 무당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무당(巫堂)이 무당(無鞺)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세습무 역시 마찬가지다. 세습무가에 태어났다고 딱히 무당 노릇을 하란 법은 없다. 무당은 얼마든지 선택을 피할 수 있는 직업이다. 실제로 전라도, 충청도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습무의 대가 끊기고 있다.
일제 강점기 민족 공동체를 말살하기 위한 방편으로 첫째 꼽은 것이 무속이었다. 무당이 굿을 하는 곳엔 으레히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기 마련이었고, 그곳에서 민족혼이 나오는 춤과 가락이 있었기에 일제는 이를 미신으로 탄압하고 무려화 했다. 이후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역시 무속을 전통 민속으로 보지 않고 미신으로 폄훼해 버렸다.
그 결과 사람 잡는 선무당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나는 아직 이 시대에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진도 씻김 굿, 남해안 별신 굿, 동해안 오구 굿 세습무들을 여러 차례 방문해 그 들의 굿 장면을 보았다. 현지에서 행해지는 굿도 보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울 한복판에서 공연무대에 올려진 국가 지정 중요 무형 문화재로써 관람한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의 전통 민속예술의 탯집이라 할 수 있는 무당들의 삼현육각속으로 들어가 육자배기 토리와 푸너리 장단을 촉(觸)으로 듣고 만지며 그들과 함께 춤을 춰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