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이강혁 강필성 기자] 경기도 안산의 한 제조업체 대표이사로 20년 넘는 세월을 경영현장에서 보낸 A(68)씨. 그는 이 업체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국내 공장을 비롯해 해외에도 서너 곳의 법인을 운영 중이다. 지역에서는 성공한 오너경영자로 손꼽히는 그는 300억원 가량의 자산가다.
그가 최근 회사의 한 임원을 주거래은행이 개최한 상속·증여 관련 세미나에 급파했다. 바로 두 아들에게 가업승계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세율이 최대 50%에 달하는 만큼 자칫 자신이 갑작스러운 변고를 당할 경우 상속세로 인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따른 행동이었다.
A씨는 상속이냐 증여냐의 갈림길에서 회사 경영의 데미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승계 방법을 찾고 있다. 20년 넘는 세월을 대표이사로 있었던 탓에 과표상 최대 300억원까지는 소득공제가 가능하지만 이도 사업관련 자산에만 적용돼 출혈이 적지 않다는 판단이다. 또, 국내와 해외 법인에 얽혀있는 지분관계는 상속과 증여의 최대 변수라고 인식하고 있다.
A씨가 주거래은행의 전문컨설팅에 기대를 거는 것은 이런 장애요인을 줄이면서 안정적인 승계가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해당 은행의 상속·증여 전문컨설팅팀 관계자는 "국가에서 세수를 확보하는 것은 좋은데 상속 과정에 기업이 존속할 수 없다면 곤란하지 않겠냐"며 "기업이 존속하면서 고용창출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아름다운 바통터치가 이루어지도록 컨설팅을 해주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씨의 이런 고민은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대기업 오너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민주화 연장선에서 상속·증여세가 점점 강화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후계승계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조세연구원에 따르면 기업인들은 가업승계를 가로막는 주된 장애요인으로 '승계관련 조세부담'(54.1%)을 꼽고 있다. 특히 가업승계를 진행중인 기업의 80%가 '과중한 조세 부담'을 우려했고, 가업승계를 진행하지 않는 기업의 경우도 조세부담(45.3%)을 승계의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다.
기업들이 승계와 관련한 조세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로펌이나 회계법인, 시중은행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이런 이유다. 경제민주화 입법 논의가 활발해진 이후 국내 대형 로펌을 비롯해 은행권까지 가서해 가업승계 관련 세미나를 잇따라 개최하고 있다.
대형로펌들의 대응은 가장 민첩하다. 상속·증여 문제는 일회성 법률자문에 그치지 않고 길게는 수년, 수십년의 일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법무법인 화우의 경우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이후 곧바로 이와 관련한 TF팀을 구성해 운영에 들어간 상태다. 최근에는 기업들의 법무실을 대상으로 상속·증여, 일감 몰아주기 과세 등을 주제로 수차례 세미나도 열고 있다.
화우는 특히 회계법인들과도 연계해 조세는 물론 관세, 공정거래, 기업형사 등 각 분야 전문가로 실무그룹을 구성, 기업 법률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5월 개최했던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과세제도 법률세미나의 경우는 재계의 대표적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기획하면서 기업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화우 측은 "경제민주화 이슈와 관련된 법률서비스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정거래, 조세, 관세통상, 기업형사분야 등 전문가로 구성된 별도의 실무그룹을 조직해 운영하고 있다"며 "올해 '기업경영인의 형사책임 위험관리', '경제민주화 공약과 기업 환경 변화' 등을 주제로 대기업 법무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관련 세미나를 꾸준하게 개최했다"고 전했다.
법무법인 세종의 경우도 지난해 이미 20여명의 조세 및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와 회계사 등을 경제민주화 TF로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태평양도 기업들의 법률자문을 원스톱으로 서비스하기 위해 20여명의 경제민주화 TF를 운영중이다. 김앤장은 올해 들어 구세청 납세자보호관, 조세심판원 조사관 등을 줄줄이 영입하면서 국내 최대의 전문인력을 구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펌업계 관계자는 "중견기업들의 경우에는 가업승계 증여세 과세특례 제도 등 기업들이 납부할 상속가액을 낮출 수 있는 여러 조세제도를 적극적으로 컨설팅하고 있다"며 "대기업도 상속, 증여 관련한 문의가 많아 법무실 등과 연계하면서 법제도의 다양한 활용방법을 찾는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로펌업계의 이런 분위기는 회계법인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삼일, 삼정, 안진, 한영 등 국내 굴지의 회계법인들은 이미 회계감사와는 물론 기업 재무자문 등에서 절세방안을 기업들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상속, 증여의 경우는 기업들이 미리미리 회계적인 부분을 점검하기 위해 자문을 구하는 사례가 많아 별도의 전담팀까지 가동 중이다.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의 경우는 세무자문 인력만 500여명을 훌쩍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중의 대형은행들도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 자체 전문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기업 고객 유치에 적극적이다. 은행들의 경우는 대기업보다는 중견·중소기업의 가업승계 컨설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다.
한 대형은행 전문컨설팅 관계자는 "국내 기업은 물론 이들의 해외법인까지를 묶어 일체의 상속증여 컨설팅을 해주고 있다"며 "지분관계 등에 따라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케이스별로 설명해주고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가가 개별적으로 사후관리에 나서는 등 지속적인 관리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왕현정 현대증권 세무투자컨설팅센터 연구위원은 "재벌 혹은 거액자산가들의 절세 노하우는 가족을 위해 매우 긴 시간 동안 준비해 증여를 진행한다는 점"이라며 "과거에는 편법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편법을 이용한 실익이 크지 않기 때문에 증여 자체를 세분화해서 세금을 미리미리 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절세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소화했던 '승계 프로젝트' 역시 최근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현재 국내 유수의 그룹 중 일부는 승계 과정에서 편법과 불법 논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는 상황에서 이같은 논란은 자칫 후계자에게 부담이될 가능성이 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몇 년 전까지는 그룹 내 재무팀이나 전략실을 중심으로 상속증여 프로젝트가가 진행돼 왔지만 '불법 리스크'라는 한계를 만났던 것이 현실"이라며 "결국 외부의 전문가의 컨설팅을 활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분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법이 복잡하고 절세가 어려워졌다는 반증.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합법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는 선진 자산관리 시스템의 개막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적 금융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과 록펠러 가문은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전문적으로 자산을 관리해왔다"며 "국내의 경우 아직 패밀리 오피스까지는 아니지만 금융,로펌 업계의 전문가 조직이 유사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패밀리 오피스는 후계자의 자산관리와 상속증여, 투자방향을 종합적으로 컨설팅해주는 전문가 조직으로 미국 내에만 4000개, 전 세계에 약 1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뉴스핌 Newspim] 이강혁 강필성 기자 (ikh@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