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윤경 국제전문기자]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방송사 HBO의 드라마 '뉴스룸(Newsroom)' 시즌2는 조금 무겁게 시작했다. 에피소드1부터 실제 벌어졌던 대형 사건들이 다수 걸려 있는데 때마침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딱딱 줄긋기가 된다는 점에서 언론에 몸담고 있는 나로선 매우 흥미진진하다.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과 이에 따른 미국의 군사작전 개시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가운데 드라마 속 뉴스룸에선 미군이 이라크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를 잡았다는 한 프로듀서의 끈질긴 취재가 사실을 살짝 왜곡보도한 것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얼마나 언론에선 하찮게 다뤄졌는지를 꼬집기도 하며,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집착하는 언론사 고위 관계자들과 앵커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기도 한다.
'트로이 데이비스 사건'도 소재가 됐다.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했던 흑인 트로이 데이비스는 결국 22년만에 사형에 처해진다.(출처=CNN) |
후에 그가 살인을 했다고 주장했던 목격자 9명 가운데 7명이 "경찰의 강압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다"며 번복했고, 살인에 썼다는 총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DNA 조사까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증거로 쓰였지만 묵살되었다.
엠네스티와 교황까지 나서서 트로이 데이비스가 흑인이란 이유가 살인 혐의의 상당부분으로 작용했다고 무죄를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22년 후인 2011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국 방송사 HBO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뉴스룸> 시즌2의 한 장면. 수석 프로듀서 돈이 고심하고 있다.(출처=사운드사이트) |
그러나 뉴스룸 내 견고한 게이트키핑(Gatekeeping; 뉴스 선정) 과정에서 묵살되었다. 사형 소식을 들은 돈이 좌절하는 장면은 우리 안의 잊혀졌던 죄책감을 되살아나게 하는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흑인 구역을 따로 나누어 살게 하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지난해 2월에는 후드티를 입은(흑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17세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이 자율 방범대원인 히스패닉계 백인 조지 짐머만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짐머만은 마틴을 범죄자로 의심해 쫓다가 말다툼 끝에 총을 쏘았다. 그런데 짐머만은 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마틴은 흉기를 전혀 소지하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자신을 쫓아오던 짐머만을 의식해 여자친구에게 이를 알리는 통화까지 했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트레이번 마틴은 35년 전의 나였을 수도 있다"며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인종차별에 대해 언급했다.
피부색이나 출신국가, 장애 여부 등으로 주택관련 차별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한 공정주거법(Fair Housing Act)도 45주년을 맞았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내면적인 인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 것이라는"이라고 연설한지 28일(현지시간)로 50주년이 됐다.
1963년 8월28일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출처=월스트리트저널) |
공교롭게도 지난 2005년 이후 8년간을 끌었던 월가 투자은행 메릴린치 내 인종차별에 대한 소송은 거액의 합의금을 내는 것으로 끝을 봤다. 연봉과 승진 기회 등에 있어 인종 때문에 차별을 받고 있다는 흑인 직원들이 메릴린치에 대해 낸 집단소송은 대법원까지가며 장기화됐다. 1억6000만달러를 배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미국 기업 가운데 인종차별에 대해 판결된 배상금 가운데 최고 수준이며 700명의 흑인 직원들이 배상금을 받게 됐지만 돈으로 다 갈무리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쓴 맛이 남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하던 1963년 8월28일 그 자리엔 막 매사추세츠주 공과대학(MIT) 경제학과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젊은이 한 사람이 있었다.
어린 시절엔 이론 물리학자를 꿈꿨으나 인종차별 실태를 보고 경제를 통해 미국을 더 공정한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그 젊은이는 연설을 듣고 신념을 굳힌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격리돼 있는 흑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고 고민하던 그 젊은이가 바로 조지프 스티글리츠다.
스티글리츠는 28일자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왜 경제학자가 되고자 했고 어떤 것들이 경제학자로서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썼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애덤 스미스가 얘기하는 시장경제의 효율성이란 기적을 믿었고 그렇게 미국을 만들어가자고 생각했다 한다. 그 전제대로라면 실업률은 노동자들의 잘못 때문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 자신도 이런 궤변(?)을 기반으로 많은 보고서를 썼다.
스티글리츠는 킹 목사의 연설을 통해 인정차별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도 배웠지만 더 큰 배움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경제적인 평등과 정의를 안겨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사실을 개탄했다. 2009년까지 백인과 흑인간 부의 격차는 20배가 되었고 2007~2009년의 경기침체(recession) 동안의 고통은 아프리칸-아메리칸에게 더 가혹했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NBC 조사에서도 흑인이 실업률은 백인 실업률의 두 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70세가 된 스티글리츠는 남은 삶도 불평등을 바로잡는데 바칠 것이라고 고백했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것의 가장 극적인 예는 나치즘에서도 봤다. 유대인들을 대학살할 수 있었던 그 광기와 지금의 흑백 차별, 사소하게 비춰질 지도 모르지만 다양성을 전혀 인정할 줄 모르는 태도의 발현들은 모두 뿌리가 다르지 않다. 보이지 않는 살인을 우리는 어쩌면 쉽게 저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유색의 피부를 얕보며 흰 피부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몰아붙이고 편파적 시각을 갖도록 유도할 자격이 없다.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인정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뉴스핌 Newspim] 김윤경 국제전문기자 (s91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