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생활 몇년을 거쳐 산업부에 처음으로 배치됐을 당시 맡게 된 업종은 페인트, 문구 등 중소기업분야였다. 비중있는 업종이 선임기자들에게 돌아갔던 만큼 종합상사업종은 당시 부서내 수석차장이 담당했다. 그 다음으로 자동차/중공업, 정유화학, 가전 등을 후임선배들이 나눠맡았다.
1997년 당시엔 그 만큼 종합무역상사의 한국경제 기여도가 컸고 비중도 상당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휴대폰, 반도체, 자동차 등 국민을 먹여살리는 업종이 다름아닌 종합상사였던 셈이다.
70년대부터 열어간 '종합상사의 성공시대'는 물론 정부시책의 기조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정부에서는 해외시장을 개척하지않는 이상, 살 길이 없다고 판단했고 대기업 종합상사가 해외시장 개척의 선봉에 서야했다.
정부는 종합무역상사 지위를 유지하기위해선 수출액이 한국 총 수출액의 2% 이상 되어야하는 조건을 달았다. 사실상 목표치이자, 할당량이 부여된 셈이다. 종합상사들로서는 생존을 위해 무리한 수출을 강행했고 손실은 그대로 해외법인의 부실로 이어졌다.
이후 IMF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누적 부실을 안고 있던 종합상사들은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7대 종합상사 가운데 대우, 현대, 쌍용이 공중분해됐고, SK는 4.3조원의 자본잠식으로 고전했다. 삼성 LG 등은 그룹내 계열사와 합병하거나 그 기능을 대폭 줄이게 된다.
당시 부실을 처리하던 대기업들의 처방전은 크게 3가지였다. 우선 대우그룹처럼 파산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임직원들이 곧바로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나앉아야했다.
또다른 방법은 우리금융지주 신한지주 쌍용그룹 대우조선해양처럼 공적자금을 받는 것이었다. 주로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발행한 채권으로 조성되는 공적자금 지원방식은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것이기에, 해당기업이 채무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국민혈세인 세금으로 충당할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가 되곤했던 것도 모두 이같은 배경 때문이다.
최근 검찰수사로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 효성그룹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효성그룹은 가장 단순하고 고지식한 방안, '벌어서 갚아가는 방법'을 선택한다. 1998년 여름, 조석래 회장은 그룹내 상위계열사인 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효성 T&C 등 4개사를 전격 통합해 ㈜효성으로 합치고 직접 대표이사를 맡아 책임경영에 들어갔다. 조회장은 당시 주거래은행인 한일은행장에게 "합병후 경영이 제대로 안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이행각서도 직접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회장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계열사수는 20개에서 11개로 줄었다.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2년간 6000억원을 만들어 빚을 갚아갔다. 그렇게 효성은 몸부림을 쳤고, 재무구조가 탄탄한 기업으로 거듭 났다.
검찰수사이후 제기되고 있는 대규모 '탈세의혹'에 대해 재계사람들은 "과연 탈세를 했을까. 세금을 안내려고 했다면 효성물산을 파산시키거나 역합병을 통해 비용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어디 강산만 변하겠는가. 시대적 정서나 상식기준, 눈높이도 바뀌고 변모한다. 15년전 당시는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제압하던 시절이었음을 국민 대다수가 인정한다. 종합상사를 축으로 한 경영활동에는 그 시절 나름대로의 관행이 존재했고 정부도 일정부분 용인했다.
하물며 15년이 지난 경영활동에 대해 '2013년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조선시대 연산군의 부관참시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연일 반복되는 국세청 조사와 검찰수사 착수. 기업을 겨냥한 사정당국의 기세는 오늘도 위풍당당하다. 국가기강을 세우고 불법 탈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라면 응원받을 일이고, 그 조사과정에서 자산 해외은닉 등 사익편취나 비자금 조성 등이 드러난다면 죄값을 치러야한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정치적 의도를 깔고 기업사정을 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경계할 일이다. 무엇보다 동시대의 국민들이 공감하는 수준의 잣대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2013년의 국민의식은 과거와는 분명 많이 다르다. /산업부장 이규석 newspim200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