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배를 가득 채운 밀항자들은 뭐 하나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믿고 의지했던 선원들은 불안함에 몸을 떨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건 명백한 균열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이 배는 지켜야만 한다.
배우 김윤석(46)이 전진호를 이끄는 선장 철주로 돌아왔다. 카리스마 넘치고 냉정한 인물이다. 솔직히 덧붙이자면 그의 필모그래피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금세 겹치는 이미지다. 때문에 영화 ‘해무’를 통해 김윤석의 새로운 모습을 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베일을 벗으니 또 다르다. 악역이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 소름이 끼친다. 치밀한 작전 설계자 마카오 박(영화 ‘도둑들’)일 때도 전설의 타짜 아귀(영화 ‘타짜’)일 때도 범죄 집단의 냉혹한 리더 석태일 때도(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일 때도 이렇게까지 섬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무’ 속 철주를 보고 있자니 어째 공포 영화를 본 것마냥 싸하다.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해무’는 영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등을 통해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받은 봉준호 감독이 제작에 나섰고 ‘살인의 추억’ 각본을 쓴 심성보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영화는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한 여섯 명의 선원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바다 안갯속에서 밀항자를 실어 나르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원작이 연극이잖아요. 이미 작품성을 확보한 상태에서 심성보 감독이 연출하고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다고 하니 또 한 번 증명된 셈이죠. 기본적인 베이스는 연극과 똑같아요. 그런데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기대감이 컸어요. 연극은 풀어가는 방식이 언어뿐이라 상상만 해야 하잖아요. 근데 영화는 그걸 재현해 낼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고 충분히 만족스럽게 나와서 좋죠.”
영화 ‘해무’로 호흡을 맞춘 배우 문성근, 김윤석, 이희준, 박유천, 김상호, 유승목(왼쪽부터) [사진=NEW] |
김윤석이 이끄는 전진호에는 문성근, 김상호, 유승목, 이희준, 박유천까지 총 여섯 명의 선원이 승선한다. 아무래도 뱃사람들의 이야기다 보니 바다 촬영으로 애를 먹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촬영을 위에 아침에 나가면 밤이 돼야 육지로 돌아올 수 있는 일정 탓에 멀미는 필수 옵션. 하지만 그럼에도 웃으면서 촬영할 수 있었던 건 스크린 속에서보다 더 돈독한 선원들의 호흡 때문이었다.
“(박)유천이를 제외한 선원들이 연극배우 출신이라 이미 아는 사이였죠. 너무나 친해서 거기서 나오는 앙상블의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고요. 구태여 우리가 기본적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선후배 간의 돈독한 게 있어서 굉장히 편했죠. 정말 이번 작품은 제가 찍은 영화 중에 최고의 앙상블이 아닐까 해요. 물론 바다에서 촬영하다 보니 멀미 때문에 고생은 했죠. 너울이 심한 날은 위험해서 촬영을 중단한 적도 있었고요. 그래도 이제 와 돌아보면 영상처럼 다 스쳐 지나가요(웃음).”
스크린 밖에서야 김윤석의 말대로 모두가 좋은 사람이겠지만, 앞서 살짝 언급했듯 영화를 보다가 흠칫흠칫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극한 상황에 치달으면서 선원들은 하나둘 이성을 잃어 가는데 그 잔상이 꽤 오래간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다가도 ‘인간이라서 나도 그러겠지’라는 상반된 생각이 오가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영화에 악인은 없습니다. 죄인도 없죠. 해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가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시대와 상황이 그런 거죠. 어쩌면 모두가 피해자고요.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거죠. 그래도 철주는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물론 도덕과 윤리를 버린다는 전제하죠. 실제로 선상 반란의 조짐을 보일 때 선장에게는 생살여탈권이 주어집니다. 그들의 입장에선 나라가 침략당하는 거니까요. 물론 그 과정과 방법이 다소 폭력적이지만, 배의 습성을 아는 사람은 당연하다고 할 겁니다. 대책 없는 폭력은 아니죠.”
‘해무’는 ‘군도:민란의 시대’, ‘명량’, ‘해적:바다로 간 산적’ 뒤를 잇는, 이른바 국내 4대 영화 배급사 여름 대작의 마지막 주자다. 하지만 사극이 아니라는 점,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다는 점에서 앞서 개봉한 영화들과 다르다. 물론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흥행 면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터. 우려될 법도 한 데 김윤석은 오히려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관객을 믿어보겠다”는 그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묵직한 메시지가 있으면서도 그 안에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이 모두 있죠. 우리나라 관객들의 수준은 굉장히 높아요. 쉽고 친절한 영화만 찾진 않을 거란 말이죠. 이 여름에 문학과 영상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영화로 과감하게 ‘해무’를 추천할 수 있어요. 단순한 재미만 추구하는, 등급이 낮은 영화가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해무’가 19금으로 신기록을 세웠으면 좋겠어요. 여름에 단순히 웃고 즐기는 영화가 통한다는 걸 깼으면 좋겠고 그렇게 될 거라 봅니다. 분명 ‘해무’가 그 시발점이 될 거예요.”
그의 말에 “그럼 이제 ‘해무’가 19금 한국영화의 새 흥행 역사를 쓰는 것만 지켜보면 되겠다”는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사실 그럴 시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터뷰 하루 전날에도 올 추석 개봉을 앞둔 ‘타짜-신의 손’(타짜2) 제작보고회에서 김윤석을 만났던 터였다. 게다가 당장 다음날 새로운 영화 ‘쎄씨봉’ 촬영을 위해 미국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보름 정도 다녀오면 좀 쉴까 했더니 곽경택 감독의 신작 ‘극비수사’도 그를 기다리고 있단다. 대체 불가능한 배우는 역시 다르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웃음). 계속 작업을 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밀도 있는 작품을 가지고 왔다가 또 ‘타짜2’처럼 재밌게 볼 수 있는 오락물로도 인사하고요. 다양한 모습으로 좋은 작품, 재밌는 작품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특히 ‘해무’처럼 굉장히 울림이 오래가고 강한 작품들에는 계속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탄산음료가 시원하지만, 숭늉같이 오랫동안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먼 훗날 제 필모그래피를 돌아봤을 때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나 ‘해무’는 내가 굉장히 아끼는 작품일 거예요. 안 놓치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그러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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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