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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강소영 기자] '박사' 총리 리커창(李克强)의 부인 청훙(程虹)은 고위 간부 집안 출신으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현모양처형 인물이다. 요즘 표현을 빌자면 전형적인 '엄친딸'에 속한다. 그녀는 현재 중국 서우두경제무역대학(首都經貿大學)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남편이 '중난하이(中南海)'에 입성 한 후에는 강단에 서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커창 부인 청훙 <사진=바이두(百度)> |
청훙은 1957년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의 명문 간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청진루이(程金瑞)는 공청단(共靑團) 조직 운영에 반평생을 바친 인물로 1964년 공청단 중앙위원에 당선돼 후야오방(胡耀邦), 후치리(胡起立)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리커창의 정계 입문과 정치인으로서의 고속성장은 장인인 청진루이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
리커창과 청훙의 만남은 리커창의 친구가 주선한 '소개팅'으로 이뤄졌다. 리커창를 만났던 당시 26세였던 청훙은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좋은 집안의 잘나가는 지식 여성이었다.
콧대가 높았던 청훙은 수 많은 남성들의 구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주변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나 리커창을 만난 후 둘은 '첫 눈'에 반했고 오래 뜸을 들이지 않고 교제 1년 후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청훙과 리커창은 당시 둘 다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부인인 청훙보다 두 살 위인 리커창은 베이징대학에 재학중이던 학창시절부터 동창들사이에 이름을 날렸다. 법학을 전공한 리커창은 법률 관련 외국 서적을 번역해 출간하고, 학단위원회 서기에 임명될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
청년 시절 청훙(왼쪽)과 리커창 <사진=바이두(百度)> |
청훙 역시 이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인재였다. 그녀는 훌륭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다. 문화대혁명의 물결이 전중국을 뒤흔들 당시 '광톈(광천)공사(廣天公社)' 소속의 쉐시메이(薛喜梅)의 비서로 활동했다.
쉐시메이는 중국 공산당이 꼽는 가장 모범적인 지식 혁명 용사로 수시로 베이징에 올라와 회의에 참석하거나 강연을 했는데, 청훙은 쉐시메이의 연설문 작성, 일정 관리 등 비서 역할을 담당했다.
청훙 역시 광톈공사의 일원이었는데, 광톈공사는 당시 지식청년이 모두 동경하는 공산당 농촌 혁명 조직이었다. 당시 청훙은 뛰어난 능력 외에 빼어난 미모로도 유명했는데, 동료들은 그녀를 '(광톈)공사 5대 꽃송이 중 하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5대 '얼짱'으로서의 미모를 자랑했던 셈이다.
광톈공사의 '5대 얼짱'으로 불리던 시기.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소녀시절 청훙 <사진=바이두(百度)> |
청훙은 농촌 혁명 참가 후 3년 뒤 하남성 뤄양(落陽)의 군사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 다시 베이징의 칭화(淸華)대학에 입학했다.
이 당시 그녀의 부친 청진루이도 중국농업공정연구설계원 당위원회 서기로 베이징에서 일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청훙 일가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청진루이도 비교적 순탄하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청훙의 부친 청진루이는 사위감인 리커창을 처음부터 매우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훙은 리커창과 결혼을 한 후 남편 리커창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열성을 쏟았다. 그녀는 아버지 청진루이를 움직여 관료로서 리커창의 출세를 적극 도왔다. 리커창이 국무원 총리가 된데는 그녀의 내조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리커창이 별다른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중앙 공청단 일원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장인인 청진루이의 ‘인맥’ 덕택이었다.
1982년 공청단 베이징시 지부는 중앙 공청단으로 올라갈 대표를 물색하고 있었다. 당시 베이징대 서기였던 리커창은 후보 중 하나였지만 낙선했다. 이때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부장인 왕자오화(王潮華)가 나서서 리커창을 중앙 공청단으로 보내는데 도움을 줬다.
당시 왕자오화를 움직여 리커창을 추천하도록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장인인 청진루이다. 청진루이는 왕자오화의 오랜 '혁명 동지'로 둘도없는 절친 관계였다.
중앙 공청단 입성은 훗날 리커창의 정치적 성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리커창은 여기서 후진타오를 만났고, 둘은 호형호제하는 선후배 관계가 됐다.
후진타오를 만난 후 리커창은 정계에서 승승장구 했고, 2013년 3월 국무원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청훙은 남편이 중국의 '넘버 투(No.2)가 되기까지 승승장구 하는 과정에서 조금도 성공을 과시하지 않았다고 주변 인사들은 말한다. 오히려 청훙 교수는 강의도 그만둔 채 혼자서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총리 부인으로서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까지도 예방하겠다는 사려깊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워낙 겸손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탓에 주변엔 청 교수의 남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리커창 해외 순방에 동행한 청훙 <사진=바이두(百度)> |
청훙의 이처럼 철저한 자기관리와 겸손하고 조심스러운 면면을 웅변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중국 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릴 무렵 청훙 교수는 석사반 제자의 학부형인 중국 모 지방 부성장(省長)으로 부터 식사 초청을 받았다.
부성장은 딸의 석사반 지도교수인 청훙 교수에게 딸을 잘 봐줄 것을 요청할 겸 해서 호기롭게 크게 한 턱 쏠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은 청훙 교수의 남편이 누군지 까마득히 모른 채 식사 자리에 꼭 가족(남편)과 함께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멀쩡한 남편을 없다고 할수도 없고 청훙 교수는 난감하기가 이를테 없었다.
청훙 교수는 "남편은 사업이 바빠 저도 얼굴보기가 쉽지않고 그래서 이번에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저만 참석하겠습니다"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청 교수가 계속해서 '남편은 참석이 어렵다'고 하자 이 부성장은 급기야 서운한 심기를 드러냈다. "청 교수! 남편이 아무리 바쁘다 한 들 부성장인 나만큼 바쁘겠소? 부성장이 식사 대접을 한다는데 얼굴 한번 내밀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요?"
부성장이 얼굴색까지 붉히며 얘기하자 청훙도 더이상은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제 남편이 정말 바빠요. 리커창이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뉴스핌 Newspim] 강소영 기자 (js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