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바람이 차츰 선선해지고 찬 이슬이 맺히면서 밤의 길이가 낮보다 점차 길어지는 기점인 한로(寒露)를 훌적 넘기고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코앞에 다가와도 낮 기온은 30도를 오르내리고 여름장마에 연이은 가을장마는 좀체 물러설 조짐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한로를 나흘 지난 한글날 대체휴일인 11일, 경북동해안과 북부내륙은 전날까지 30도를 넘나들던 낮 기온이 17도 내외를 보이며 뚝 떨어져 흡사 초겨울의 날씨처럼 쌀쌀하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벼 익은 울진 근남면 노음들. 2021.10.11 nulcheon@newspim.com |
세상도 절기도 모호하다. 그리움도 꿈도 흐릿하다.
추분과 한로 사이 보름간은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 선선하고 차가운 기운이 돌며, 특히 만곡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이 무렵 농촌은 한 해 애써 가꾼 농작물의 추수를 서둘러 마치는 시기이다.
지구온난화가 전 지구적 위기로 다가오고 몇 해 전부터 동해는 생전 보지 못했던 아열대 어종이 흡사 제 안방처럼 유영하고 있다. 예전처럼 절기의 경계도 분명치 않다. 계절이 바뀌는 징후나 조짐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흡사 요즈음 정치판같다.
150여일 앞으로 다가 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은 여·야 할 것없이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치는 이전투구의 아수라판이다.
국민들은 이미 한국사회의 공정과 공평을 믿지 않은 지 오래이나 여전히 정치판은 너도나도 공정과 평등과 공평을 목청껏 외친다.
자기들만의 공정이다. 이제 공정과 공평은 한국사회의 권력과 부를 차지한 2%가 대물림을 위한 구실로 내세우는 구호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민중들은 그런 2%의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고물을 줏어담기 위해 한 편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한편으로는 기회만 있으며 줄서기에 혈안이 돼 있다.
오곡백과를 수확하고 이슬이 찬 공기를 만나서 서리로 변한다는 한로가 지나자 산야는 제마다의 색깔로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제비 등의 여름새는 이 무렵이면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고 기러기 등 겨울새가 찾아들 것이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물봉선. 2021.10.11 nulcheon@newspim.com |
농산촌의 실개천은 물봉선과 물달개비와 닭의장꽃 세상이다.
생물은 어김없이 제 때를 찾아 잎사귀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 서로 앞다투어 꽃잎을 열며 마구 어지러이 피어나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모두 제자리를 지킨 채 이웃자리를 넘보지 않는다.
물봉선에 이웃해 닭의장꽃이 속살을 열고 물달개비가 자기 만의 향을 날리며 나비를 부른다.
끊임없이 아귀다툼을 일삼는 사람들과는 영 딴판이다. 나비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제 방식대로 이곳저곳을 넘나든다. 나비는 하루종일 제 각각의 향을 함께 담으며 짝짓기도 은밀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수행한다.
마을 앞산에 뿌리를 내린 수 십년은 족히 넘었을 밤나무에서 농염하게 몸을 부풀린 밤이 툭툭 떨어진다. 울진지방에서는 이를 '찰락'이라 부른다. '찰 만(滿)'자와 '떨어질 락(落)'자에서 '찰락'을 차용한 의미인 듯하다. 새벽녘 부지런한 농군들은 '찰락이'를 한 자루씩 줍는다.
[대구경북=남효선 기자] 2021.10.11 nulcheon@newspim.com |
[봉화=뉴스핌] 남효선 = 사과 익어가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마을. 2021.10.11 nulcheon@newspim.com |
햅쌀에 이어 제일 먼저 맛보는 햇과일 수확의 포만감이 부지런히 주은 햇밤 자루처럼 넉넉하게 농꾼의 가슴을 채운다. 그래도 가슴 한켠은 예전처럼 푸근하지만은 않다. 갈수록 살림살이가 빠듯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2년째 미증유의 재앙인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급습하면서 이웃 간의 소통도 단절됐다. 너무 급작스럽게, 급하게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미처 단절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앗긴 일상의 분노를 정부에 쏟아내고 있다.
도시로 나가 어렵게 자리잡은 자식들 소식도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평생 허리띠 졸라매고 어렵게 도시로 보내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나, 여전히 마땅한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른바 2030 MZ세대의 고독사와 집단사가 최근 몇 년 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흡사 역병처럼 한국사회를 억누르고 있다.
TV를 통해 연일 전해지는 암울한 소식에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가 짓누르는 듯 먹먹하다. 윤기 흐르는 햅쌀로 지은 밥맛도 영 흥이 나질 않는다.
젊은이들이 설 곳이 없다. 의료기술 발달로 백세 시대가 열리면서 60대의 노년들도 설 곳이 없다며 푸념한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고, 평생을 공직에서 공기업에서 호가호의해 온 사람들은 수 억원 대의 퇴직금을 받아들고 다시 관련 기업체에서, 이익단체에서 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울진=뉴스핌] 남효선 기자 = 경북 울진의 대표적 전통장시인 '울진바지게시장'. 2021.10.11 nulcheon@newspim.com |
방송은 연일 '고소득층은 살기 좋아지고 서민가계는 점점 살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사회경제적 불평등 격차가 고착화됐다고 우려의 목소리로 떠들어대지만 정작 정치권은 꿈적도 않는다.
외려 국민들의 아우성과는 달리 청개구리 마냥 정 반대이다. 가끔씩 정색하듯 서민정책이라고 발표하기는 하지만 그 또한 '언 발에 오줌누듯' 전형적인 생색내기용이라는 것을 이 땅의 서민들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여름인 듯 가을인 듯 불볕으로 세상을 달구다 슬그머니 서늘한 기운이 세상을 휘감는다.
도무지 계절이 서로 손을 흔들며 바뀌는 문턱이 모호하다.
사람들의 질서가 '몇 안 되는 가진 자' 중심으로 급격하게 고착되고 있는 이 시간, 자연은 제 각각, 그러나 이웃한 것들끼리 어깨를 맞대고 꽃을 피우고 속살을 열고 자기만의 향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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