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한미 정상회담 앞두고 돌출악재
용산 안보실 비밀대화 고스란히 담겨
한미동맹 공들인 尹정부 고민 깊어져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미국 정보기관이 서울의 용산 대통령실을 상대로 우크라이나전 관련 한국 정부의 입장을 도청(eavesdropping)한 사실이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보도로 드러나면서 파문이 번지고 있다.
한국의 최대 우방인 미국이 한미관계 현안 등과 관련한 한국의 속내를 알기위해 상대측 지역에서 버젓이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는 점에서다.
[서울=뉴스핌]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대통령실SNS] 2022.11.13 photo@newspim.com |
특히 집권 이후 한미동맹을 강조해온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의 당혹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오는 26일 한미 정상회담 일정이 잡혀있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고도화에 따른 한미일 동맹 강화가 무엇보다 절실한 국면이라 윤 대통령과 정부 고민도 커지는 양상이다.
◆윤 대통령 방미 앞두고 불거진 돌출 악재
한미 간에 도청 문제가 논란으로 떠오른 건 전례가 없지 않다.
지난 2013년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안보국(NSA)이 '프리즘'(PRISM)이란 감시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국⋅일본⋅프랑스⋅독일 등 우방국가 정상들의 대화 내용을 엿들은 사실을 폭로해 파장이 번지기도 했다.
당시 영국매체 가디언은 미국이 주미 한국대사관 등 무려 38개 공관을 대상으로 도청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70년대 서울의 미 정보기관이 광화문 주한 미대사관을 거점으로 청와대 상대 도청을 시도했고, 이에 대응해 정부가 막대한 비밀 예산을 들여 방지 설비를 했는데 국회가 이를 문제 삼자 고위 당국자들이 의원들에게 읍소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정보 당국 관계자들 사이에 회자된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서울 광화문 주한 미국대사관2021.06.24 yooksa@newspim.com |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불과 지난달 초 김성한 당시 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 등 우리 정부 핵심 외교⋅안보 인사들이 나눈 대화가 한 달 만에 생생하게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개됐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당장 이달 26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북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안보현안과 한미 간 경제⋅통상 이슈를 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고민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윤 정부가 집권 이후 집중해 온 한미동맹 강화 문제 등이 자칫 빛이 바랠 수 있고 국민들의 불편한 시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여 윤 대통령과 정부는 상당한 부담을 떠안을 공산이 크다.
◆포탄 대미 수출 둘러싸고 한⋅러 관계 갈등 커질 수도
NYT 등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유출된 문건은 100쪽에 이른다. CIA와 NSA는 몰론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등이 만든 보고서를 미 합동참모본부가 취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전 뿐만이 아니라 북한 핵과 중국, 중동 문제 등과 관련한 도청 등 정보 수집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미 CIA가 용산 대통령실을 감청해 얻어낸 정보 가운데 핵심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유출된 문건과 관련해 "3월 초 한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수출해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고심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전했다.
특히 이런 첩보를 획득하는데 시긴트(SIGINT)가 활용됐다고 밝혀 도청에 의해 이뤄졌음을 알렸다.
정보수집 수단 가운데 하나인 시긴트는 '시그널'(signal)과 '정보'(intelligence)를 결합한 용어로 위성이나 특수장비를 활용해 통신⋅통화 내용을 감청하는 방법을 말한다.
직접 정보원과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는 휴민트(HUMINT)와 함께 대표적인 첩보수집 방법이다.
[서울=뉴스핌] 김태훈 기자 =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지난해 12월 21일 사이버안보 TF 운영 결과 점검회의를 개최했다.[사진=대통령실] 2023.02.09 taehun02@newspim.com |
이번에 공개된 도청 내용을 담은 문건에는 이 전 비서관이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이후 우리 정부가 견지해온 정책을 변경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을 공식화 하는 방안이 등장한다.
하지만 김성한 전 실장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회담과 무기 지원을 거래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음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김 전 실장은 폴란드에 포탄을 수출하고, 폴란드가 다시 이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우회지원 대안을 제시하는 등 묘안을 짜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 등이 관여된 민감한 외교⋅안보 이슈 사이에서 큰 고심을 할 수밖에 없는 한국 정부 핵심인사들의 대화 내용을 도청으로 고스란히 파악해낸 미국은 윤석열 정부의 입장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한미동맹이나 대(對) 한반도 정책을 짜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번 공개로 러시아도 한국 측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게 된 셈이고, 이는 우리 정부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한국의 대미 밀착에 경고를 보내면서 이런저런 압박과 보복 조치를 강구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보다 확실한 판단 근거를 갖게 됐다고 생각할 것이란 점에서다.
경우에 따라 미국의 도청이 한⋅러 관계의 갈등을 키우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전례 살펴보겠다"는 尹정부...한미 역학구도 상 강력대처 어려워
대통령실의 핵심 파트인 외교안보실 핵심 인사들의 대화 내용이 그대로 노출된 상황이지만 정부 안팎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휴일인 9일 오후 브리핑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과거의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번 (살펴)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대통령실 입장은 아직 SNS나 미국 유력 언론의 보도 외에 도청 사실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된 게 없다는 점에서 사실관계부터 우선 들여다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북한 관영매체는 2023년 3월 2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했다"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 뒤 벽면에 '화산-31' 전술핵탄두 도면이 보인다. [사진=조선중앙통신] |
무엇보다 과거에도 이런 유사한 도청이나 스파이 활동 사례가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었지만 한미관계의 근간을 흔들거나 악화시킨 경우가 없었다는 점을 대통령실과 외교⋅안보부처 당국자들은 강조한다.
한 국책 연구기관의 박사는 뉴스핌과의 통화에서 "무엇보다 공개된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미국의 압박과 러시아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한국의 입장을 고민하는 것일뿐 한미, 한러 관계를 해칠 발언이나 정책방향 등이 드러난 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안팎의 이런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에 사실관계 확인 요청이나 유감 표명 등을 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법이나 재발방지 등을 요구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한미 간 역학관계 상 이를 외교문제화 하거나 사실관계 규명 등의 단계로 이어가려면 상당한 외교적 부담이나 부작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 스노든의 폭로사태 때도 당시 정부는 깊은 우려와 납득할 만한 설명과 신속한 조치를 미국 측에 촉구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후 미국이 특별한 대처방안을 한국에 제시한 적은 없다.
미 국방부는 9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소셜미디어에서 나도는 민감한 극비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 촬영본의 유효성을 살펴보고 평가하고 있는 중"이라는 입장만 내고 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미국은 CIA 등 정보기관의 비공개 첩보활동에 대해 공식 확인하거나 인정한 전례가 거의 없다.
상대국이나 자국 내 외교공관을 상대로 한 불법적인 첩보활동을 시인한다는 건 미국뿐 아니라 어느 국가 정보기관에게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결국 이번 사태는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나 코앞으로 다가온 한미 정상회담, 북핵 대응을 위한 한미일 공조 등 한국 측의 필요에 의해 파장을 최소화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공산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