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엄마와 두만강 건너
고생하면서도 그림 멈추지 않아
화가 꿈 이뤄 불교사찰 단장 활동
"통일되면 고향에 꼭 돌아갈 것"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탈북민 화가 김정운(41)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은덕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을 사람들은 몹쓸 곳으로 일컫고는 한다는 걸 성장하면서 알게 됐다.
[서울=뉴스핌] 제주에 정착한 탈북민 화가 김정운 씨가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남북하나재단] 2023.12.11 |
탈북 이후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면 아오지행이야'하며 우스갯거리로 삼고는 하는 아오지가 은덕의 옛 이름이다.
북한은 1977년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란 뜻으로 아오지의 원래 지명인 경흥을 은덕으로 바꾸었다가 2005년에 다시 경흥군으로 환원시켰다.
가난한 탄광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세 살 때부터 연필만 쥐어주면 그림을 그렸다. 유치원에 보내도, 인민학교에 보내도 공부보다는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남의 집에 가서 당시 유행하는 만화영화를 보고 온 날이면 공책 하나가 방금 본 만화 그림으로 금방 가득 채워졌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그는 미술소조에 다녔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식량난으로 인한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건너편 중국 훈춘에선 개가 쌀밥을 물고 다녔지만, 이쪽 강변 사람들은 무리로 굶어죽었다. 특히 탄광마을인 아오지에서는 고난의 행군 때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정운 씨도 학교 친구들이 굶어죽고, 장마당에서 시신이 뒹구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참다못한 정운 씨 가족은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건너편에 고모들도 살고 있어 중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보다 는 조건도 좋았다.
정운 씨의 아버지는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먼저 딸을 데리 고 두만강을 넘었다.
◆아사자 속출하던 '고난의 행군' 때 가족과 탈북
1998년 봄, 내일이면 중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설레하던 아들에게 어머니가 "오늘밤 아버지와 누나가 있는 데로 간다"며 옷을 입혔다.
정운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둠을 틈타 두만강을 건넜다.
공안의 감시를 피해 다녀야 하는 긴장 속의 생활이었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2001년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아르바이트 회사 사장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그를 소개시켜 준 것이다.
정운 씨는 학원원장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학원비는 돈을 벌어서 내면 안 되겠습니까."
원장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한 뒤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운 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1년쯤 지나니 원장은 그에게 학원 열쇠를 맡겼다.
학생들이 돌아가면 학원을 청소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가 다닌 학원은 방학 시즌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방학 두 달 동안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학원에 학생들이 넘쳐나면 정운 씨도 원장을 도와 학생들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쳐줬다. 1년 반이 지난 2003년 어느 날 원장이 그를 불렀다.
"밖에서 버는 만큼 돈을 줄 테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때?"
정운 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때부터 그는 연변 출신의 강사로 신분을 속이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원장은 그에게 학원 관리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서울=뉴스핌] 탈북민 출신 화가 김정운 씨가 탱화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남북하나재단] 2023.12.11 |
2007년 후반 또 다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일이 생겼다. 우연한 기회에 산둥성 칭다오에서 그림 사업을 하는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그가 만난 첫 한국인이었다. 무단장에 놀러 왔던 한국인 사업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운 씨를 만났다.
그는 정운 씨의 그림을 본 뒤 칭다오의 자기 회사에 오면 한국식 그림기법을 가르쳐주고, 대우도 더 많이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정운 씨는 망설임 없이 다니던 학원에 작별인사를 하고 칭다오로 옮겨갔다.
새로운 스승 밑에서 정운 씨는 탱화(불화) 그리는 법을 배웠다.
칭다오는 한국에서 멀지 않은 도시이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살았다. 이곳에서 정운 씨는 한국TV와 출판물을 실컷 봤다.
한국으로 떠나는 모험은 정운 씨의 누나가 먼저 감행했다. 탈북도 누나가 먼저 했고, 한국에도 누나가 먼저 왔다.
한국에 온 누나는 "여기가 너무 좋다"면서 가족을 데려올 작전을 짰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구입한 가짜 호적으로 가짜 여권을 만든 정운 씨는 2016년 4월 부모님과 5세 된 아들과 함께 상하이 국제공항에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 가족은 누나가 알려준 대로 입국 심사를 받기 전 탈북 가족이라고 밝혔다. 이후 가족 모두 제주공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조사기관으로 가야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탈북민 정착 과정을 밟고, 2016년 8월 마침내 사회로 나왔다.
◆제주면세점 취직해 작업실 만들 돈 모아..."통일되면 고향 돌아갈 것"
하나원에서 어느 곳에 가서 살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정운 씨는 주저 없이 제주도를 선택했다.
다시 그림을 그리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운 씨는 이듬해인 2017년 2월, 제주공항 면세점에 취직했다.
공항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이미 그림은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됐기 때문이다.
탱화도 그렸지만 다른 작품도 그렸다. 2018년 이북5도청에서 주최하는 통일미술대전에 참가해 입상하기도 했다. 백발의 실향민 할아버지가 손녀를 안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2020년 2월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자 제주공항에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면세점에서 일하던 정운 씨도 자의 반, 타의 반 사직서를 쓰고 나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면세점에 취직하면서 3년 동안 돈을 모아 미술 작업실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꾸준하게 실천한 결과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가정이 안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남았던 아내는 2017년 한국에 왔다. 그해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3년 전 딸도 얻었다.
그림으로 인연을 맺은 아내는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다. 정운 씨가 그림의 디자인과 설계를 하면 아내는 선과 보조색깔을 입힌다.
탈북민 화가가 자리를 잡고, 작품 판로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에만 집중해 살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특히 그림을 완성하고 일화(一華)라는 자신의 호를 적어 넣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마저 잊게 될 정도다.
"왜 하필 탱화를 그리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탱화 시장은 인공지능과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손이 반드시 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유행도 타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앞으로도 계속 사람이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라질 분야가 아닙니다."
정운 씨는 북한에서 태어나 16년을 살고, 중국에서 18년 살았으며, 한국에서 7년째 살고 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한족들과 살 때는 가끔 우리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한순간도 나는 한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아들들은 저처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도록, 완벽하게 한국 남자로 키워 군에 보낼 생각입니다."
그에게 통일이 돼도 제주도에 계속 뿌리 내리고 살 것이냐 묻자 단호한 대답이 나왔다.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반드시. 가족들도 다 데리고요."
지옥 같은 아오지를 벗어나 살기 좋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린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경흥과 인접한 나진, 선봉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를 낀 황금의 삼각주입니다. 자녀들에겐 제주도보다는 훨씬 더 큰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바다도 끼고 있고요. 하하하."
정운 씨 가족의 유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 못지않게 푸르고 깨끗한 나진 바다에서 그의 유랑은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란 그의 꿈을 위해 정운 씨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