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세터 변경·외국인 선수 제외 등 과감한 선택으로 증명
[서울=뉴스핌] 남정훈 기자 = 시즌 개막 전까지만 해도 흥국생명이 상위권 경쟁을 펼칠 것이라 내다본 시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후반기로 향하고 있는 지금, 흥국생명은 당당히 선두권 경쟁을 벌이는 팀으로 탈바꿈했다. 그 중심에는 새 사령탑 요시하라 도모코 감독의 '무한 경쟁'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흥국생명은 지난 18일 화성종합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진에어 2025-2026 V리그 여자부 원정 경기에서 IBK기업은행을 상대로 풀세트 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3-2 역전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4연승을 달린 흥국생명은 승점 41(13승 10패)을 쌓으며 2위 현대건설(승점 42)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1라운드를 6위(2승 4패)로 마쳤던 흥국생명은 4라운드 들어 4승 1패로 1위를 달리는 등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이 같은 변화는 더욱 놀랍다. 시즌 전 흥국생명은 '최하위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전력 평가가 좋지 않았다. 팀을 이끌던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이 떠났고, 리그 최고의 스타이자 상징이었던 김연경이 은퇴를 선언했다. 여기에 외국인 선수로는 과거 IBK기업은행에서 방출된 경험이 있는 레베카 라셈(등록명 라셈)을 영입하며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섰다. 객관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반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요시하라 감독은 이러한 불안 요소를 정면 돌파했다.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일본 V리그 명문 JT 마블러스의 지휘봉을 잡으며 우승 2회, 준우승 3회를 이끌었던 그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흥국생명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의 첫 과제는 '리빌딩'이었지만, 결과는 단순한 체질 개선을 넘어 성적과 경쟁력까지 모두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김연경 공백을 메우기 위한 요시하라 감독의 해법은 조직력과 기본기였다. 부임 직후 그는 공 하나를 다루는 법부터 다시 가르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본기를 강조했다. 리시브와 디그 등 배구의 본질적인 요소를 반복적으로 훈련했고, 그 결과 흥국생명은 리그 최소 범실 1위(174개)를 기록하며 안정적인 팀 컬러를 확립했다. 화려함보다는 탄탄함을 앞세운 변화였다.
요시하라 감독의 또 다른 핵심 철학은 '영원한 주전은 없다'는 원칙이다. 그는 모든 선수가 언제든 주전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말이 아닌 코트에서 증명했다. 지난 시즌 김연경의 파트너로 주목받았던 아웃사이드 히터 정윤주 역시 절대적인 주전이 아닌, 김다은·최은지와의 경쟁 구도 속에 놓였다. 누구든 컨디션과 경기력에 따라 코트에 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세터진 운영 역시 흥국생명 상승세의 중요한 요소다. 주전 세터 이고은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영입한 베테랑 이나연은 팀 공격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레베카뿐 아니라 국내 공격수들과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그동안 원포인트 서버 역할에 머물렀던 김다솔을 더블 체인지 상황의 세터로 적극 활용하며 전술적 폭도 넓혔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요시하라 감독의 색깔은 분명하다.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높은 V리그 현실 속에서도 그는 국적이나 이름값에 흔들리지 않는다. 경기력이 떨어지면 외국인 선수라도 과감히 벤치로 불러들인다. IBK기업은행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경기였다.
당시 레베카는 감기 몸살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공격 성공률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요시하라 감독은 4세트 시작과 함께 레베카를 벤치로 내렸고, 아시아쿼터 외인 아닐리스 피치(등록명 피치) 역시 부진을 이유로 주전에서 제외했다. 대신 문지윤과 김수지를 투입했다. 문지윤은 4세트에서만 팀 내 최다인 5점을 올리며 감독의 선택에 보답했고, 김수지는 블로킹 2개로 중심을 잡았다.
5세트에서는 레베카가 다시 코트에 들어왔지만, 공격은 특정 선수에 집중되지 않았다. 최은지와 김다은이 고르게 공격을 나누며 팀 승리를 완성했다. 결국 흥국생명은 선두권 경쟁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된 IBK전에서 값진 3-2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요시하라 감독은 외국인 선수들을 제외한 결정에 대해 "플레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뺐다"라며 "컨디션이 어떻든 코트 안에서는 핑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흥국생명에는 누구에게도 보장된 자리는 없다.
선수들도 이 철학을 체감하고 있다. 아웃사이드 히터 김다은은 "시즌 내내 주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감독님이 모두가 주전이 돼 달라고 말씀하셨다"라며 "그 점이 팀에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작전타임에서도 요시하라 감독은 소통을 중시한다. 그는 큰 틀의 방향만 제시한 뒤, 선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해법을 찾도록 유도한다. 상황에 따라 세터에게 개별 지시를 내리며 세밀한 운영도 병행한다.
흥국생명의 돌풍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시하라 감독의 철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 그리고 경쟁을 받아들인 선수들의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다.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높았던 V리그에 '영원한 주전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요시하라 감독의 리더십은, 올 시즌 흥국생명을 가장 흥미로운 팀으로 만들고 있다.
wcn05002@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