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이 말하는 미 국무성의 국익분류법…한국의 선택은
리처드 밀허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한국인들에게 ‘워터게이트(Watergate)’로 사임한 미국 37대 대통령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외정책 전략가이자 국제문제 전문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닉슨은 1969년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해 동서냉전을 완화시키는 데탕트 시대를 열고 베트남전을 종식시켰다. 소련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던 중국에는 탁구팀을 보내 ‘핑퐁외교’를 시작하고 1972년 중국 베이징(北京)을 직접 방문해 미중수교(공식수교는 1979년 1월1일)의 초석을 놓는 ‘상하이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4년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에는 뉴욕타임스 등 유력매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많은 국제관계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1992년 출간한 <순간을 포착하라(Seize the Moment)>는 책은 미국 국무성의 국익분류법을 소개하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재구성)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동서냉전이 서방의 승리로 귀결되고 제1차 걸프전쟁이 종결된 직후다. 이 책의 부제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도전(America's challenge in a one-Superpower world)>이다.
닉슨은 미국의 국익을 3단계로 분류한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1992년 펴낸 <순간을 포착하라(Seize the Moment)>. |
여기에 해당하는 국가들은 중남미의 멕시코 쿠바 파나마, 서유럽의 독일 노르웨이, 중동(걸프지역)의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동북아시아의 일본 등이다.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 등은 이 카테고리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혈맹’이라고 부르지만 한국 역시 미국의 사활적 이해를 다투는 첫 번째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바이탈 인터레스트’에는 이에 해당하는 미국의 국익이 침해당했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둘째 카테고리는 미국 국익 중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이익들로 분류하는 ‘크리티컬 인터레스트(critical interests)’다. 영어에선 어떠한 물리 현상이 갈라져서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계인 임계량을 ‘critical mass’, 물이 끓는 임계점을 ‘critical point’ 등으로 표현한다.
닉슨에 따르면 ‘크리티컬 인터레스트’는 어떤 이익을 잃을 경우,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바이탈 인터레스트’ 중의 하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때다. 미국의 동맹이면서 첫째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카테고리를 연결시켜 풀이하자면 한국에서 발생한 전쟁은 미국의 생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진 않지만 한국이 무너질 경우 동해를 경계로 미국의 ‘바이탈 인터레스트’ 국가인 일본이 직접 공산주의와 맞닥뜨리게 된다. 즉 한국의 안전보장은 미국의 사활적 이해관계로 분류된 일본의 안전보장에 직결되므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에 주한미군이 ‘인계철선’ 역할도 한다.
그런데 한국과 관련된 문제 중 ‘크리티컬 인터레스트’가 아니라 ‘바이탈 인터레스트’에 해당되는 이슈가 있다. ‘바이탈 인터레스트’에는 국가뿐만 아니라 석유, 식량, 물, 기후변화와 같은 이슈들도 포함되는데 한반도에서 이에 해당하는 이슈가 바로 북한 핵문제다. 닉슨은 미국은 개발도상국가 중 잠재적 침략자들이 핵무기를 획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북한이 통제불가능한 핵보유국이 될 경우 미국이 직접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 인정은 일본의 핵무장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한국의 핵보유로 이어져 결국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 국가 모두가 핵무기 보유국가가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기본 인식이다.
미국의 국익 중 세 번째 중요한 카테고리는 주변적인(부수적인) 이익들로 분류되는 ‘페리페럴 인터레스트(peripheral interests)’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 정부의 국익 분류가 집권당이나 대통령에 따라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국익 순위를 바꾸거나 침해하는 행위는 의회와 언론, 학계는 물론, 이해당사자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닥칠 것이 자명하다.
◆ 박근혜·오바마 대통령 첫 북핵 공동성명의 의미는?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지난 16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북핵 문제만 별도로 담은 정상 차원의 첫 공동문서인 ‘2015 북한에 관한 한미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은 “북핵과 북한에 관한 별도 성명이 한미 양국 정상 차원에서 채택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그만큼 한미가 북핵과 북한 문제에 높은 정책적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북핵 문제를 ‘바이탈 인터레스트’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구문이다. 어찌 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찾은 박 대통령이 한 달 만에 다시 워싱턴을 방문하게 한 데 대한 의전 차원에서 국익캐비닛 중 첫 번째 서랍 깊숙이 박혀있던 ‘북핵’ 파일을 책상 위에 잠시 올려놓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동맹도 미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지 한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이나 ‘혈맹’이란 수사적 표현보다 한국의 실질적 국익에 부합하는 성과를 도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발표된 첫 북핵 공동성명에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구체적인 비핵화 ‘액션플랜’이 포함되지 않은 점과 한국형전투기(KF-X) 사업에 필요한 핵심 기술 이전이 무산된 것은 상당히 아쉽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선임기자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