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전 통보도 없이 '집결'…이재용식 실용주의와 배치
[뉴스핌=황세준 기자]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들이 각자도생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가운데 수요 사장단회의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안팎으로 부상하고 있다.
8일 삼성에 따르면 이날 수요 사장단 회의는 오세진 중앙대 교수를 초빙해 '구성원 행동을 통해 조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강연을 듣는 자리로 마련됐다. 이 자리에는 미래전략실 및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했다.
하지만 주요 사장들 중 불참자도 상당수였다. 헤외 일정으로 바쁜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무선사업부장)은 4월 마지막주 이후 6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근 조선업 구조조정 이슈의 한가운데에 있는 삼성중공업의 박대영 사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각 불발설이 전해진 제일기획의 임대기 사장 역시 평소와 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요 사장단 회의 공식 명칭은 '삼성 수요 사장단 협의회'다. 이병철 선대 회장 때 의사결정기구였던 '수요회'가 모체로 2008년 삼성특검을 계기로 '사장단협의회'로 변경했다.
이 자리는 이름과 달리 주요 사항을 협의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삼성 사장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부분 참석하고 있으나 반드시 참석하라는 내부 지침은 없다.
참석하는 사장들도 주제를 미리 알지 못한채 아침 일찍부터 서초사옥으로 집결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제에 따라서는 내용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장들도 있다.
서울 서초구 삼성 서초사옥에 회사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사진=이형석 사진기자> |
이날 회의 직후 몰려나온 사장들은 조직변화와 관련해 어떤 적용할 부분이 있을지를 묻는 질문에 그냥 웃거나 "어려운 것 묻지 말라"며 자리를 떴다. 최근 한 사장은 "우리 쪽이랑 관련 없는 주제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다른 사장은 "주제를 알고 오는 게 아니다"라고 전했다.
수요 사장단 회의는 통상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주재로 열린다.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등 오너 일가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과거 이건희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한 적이 있었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까지 사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한 적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장단 회의가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거나 사업적 영감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준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삼성 안팎으로는 사장단 회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점차 부상하고 있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의 각자도생 및 실용주의 방침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실제 수요 사장단 회의가 끝난 후 사장들이 복귀하는 거리를 보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송도로 약 50km,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판교로 약 15km, 삼성전기와 삼성SDI는 수원 및 용인으로 약 35km를 달려가야 한다. 차로 많게는 1시간이 소요된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현장경영을 강화하려는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에 따라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대부분의 인력이 사업장으로 내려갔다. 사장들은 통상 회의를 마치고 9시~10시 사이에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전 일과를 모두 서초사옥에서 보내버리게 되는 셈이다.
삼성이 현재 삼성전자를 필두로 조직문화 대수술 작업을 진행 중인 점에서 수요 사장단 회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삼성전자는 낡은 기업문화를 쇄신, 스타트업과 같은 일하는 방식을 도입해 23년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에 이은 이재용식 '뉴삼성'을 만드는 작업에 지난 3월부터 착수했으며 이달 중순경 임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물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재용식 뉴삼성의 핵심 중 하나는 수평적 조직문화다.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조직문화의 산물인 수요 사장단 회의는 조직원의 자발성을 근간으로 하는 뉴삼성 체제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장단 회의가 실상 언론과의 비공식 소통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폐지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 고위 관계자도 "아직까지 폐지한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고 일축했다.
실제 8일 회의 직후 홍원표 삼성SDS 사장, 김신 삼성물산 사장 등은 '삼성SDS 물류사업 분할 및 합병' 이슈에 대해 '물류 사업 분할을 검토 중이나, 합병은 검토한 바 없다'는 공통된 입장을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앞서 6월 1일자 회의 출근길에는 평소 쪽문을 애용하던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정문으로 들어오면서 서울고등법원이 전날 일성신약과 소액주주에 대해 주식 매수가격을 올리라고 판결한 것에 대해 반박했다.
지난해 6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엘리엇이 복병으로 부상했을 당시에도 수요 사장단 회의가 소통 창구로 활용된 바 있다. 당시 삼성 금융계열사 사장 등이 매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며 대변인 역할을 했다.
재계는 사업재편을 통해 이재용 체제 구축이 안정권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삼성 수요 사장단 회의도 자연스레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뉴스핌 Newspim] 황세준 기자 (hsj@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