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황수정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이렇게까지 좋아해주실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커튼콜 때 기립박수도 쳐주시고, 환호도 많이 해주셔서 너무 영광이고 뿌듯해요. 체감상 '룸 서울'은 두 시간 정도 하는 것 같고, '룸 알레포'는 너무 짧은 것 같고. 각각 두 시간짜리 개별 공연으로 만들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배우 손지윤(34)이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강렬한 모습으로 무대를 장악 중이다. 그는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의 콤비의 신작 연극 'The Helmet-Room's Vol.1'(이하 '더 헬멧')에서 헬멧B 역으로 열연을 펼치고 있다. '더 헬멧'은 하얀 헬멧을 공통 소재로 서울과 알레포를 배경으로, 다시 빅 룸과 스몰 룸으로 나뉘어 4개의 대본으로 공연되는 독특한 구조의 작품이다.
먼저 '룸 서울'은 1987년과 1991년을 배경으로, 민주 시위를 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진압하는 사복 경찰관 백골단의 이야기를 담는다. 손지윤은 '룸 서울'에서 백골단에 쫓기는 학생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극의 주인공이자, 후반부에서 반전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처음에는 배역을 정하지 않은 채 리딩 연습을 시작했어요. 사실 제가 그 역할을 할 줄 몰랐죠.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을 많이 했죠. 1987년에는 철이 없기도 하고 마음만 앞서기도 했지만, 이후 1991년에는 뭐가 옳고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극 중에서 그 과정에 보여지지는 않지만 충분히 겪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주체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었어요."
특히 '룸 서울'은 현재 영화 '1987'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민주화항쟁 시기를 다루면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손지윤은 당시의 기억이 없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직접 겪었던 사연을 들으며 더욱 몰입하게 됐다.
"이번 작품을 하게 되면서 부모님과 얘기를 했는데, 어머니께서 백골단 때문에 아빠를 못 봤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가 데모에 참여하신 건 아니지만 술에 취해 길에서 쉬는데 백골단이 와서 그냥 구타하고 잡아가고 그랬대요. 아버지는 겨우 도망쳤는데, 집에 돌아와서 서럽고 분해서 엉엉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다음날 대본에 욕이 없는데 그냥 욕이 나오는 거에요. 욕을 줄이려고 했는데, 작가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 조금씩 자제하며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제 역할을 알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부산에서 올라온 학생'인 캐릭터를 맞추기 위해 사투리도 열심히 배웠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점은 액션 연기. 손지윤은 스몰 룸에서 여성 배우와, 빅 룸에서는 남성 배우와 격렬하게 싸운다. 차고, 때리고, 구르고, 목말까지 타는 등 '관절과 연골이 남아나지 않고, 혜화동 병원은 모두 접수했다'는 손지윤의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무술 감독님이 잘 가르쳐줘서 감사했고, (이)석준 오빠도 많이 가르쳐줬어요. 팀원들 덕분에 할 수 있었어요. 서로 누가 할 것 없이 파스 발라주고, 약 발라주고, 마사지 해주고, 그렇게 부대끼다 보니 공연 때 싸워야 하지만 엄청 든든하고, 서로가 적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듯한 생각이 들어요. 너무 좋은 경험이었고, 고맙고, 뭉클하고. 힘든데 정말 희한하게 즐거웠어요.(웃음) 공연 직전까지 계속 합을 맞추면서 연습해서 다행히 아직까지 사고는 없어요."
반대로 '룸 알레포'는 시리아 내전 현장에서 활동하는 민간 구조대 화이트헬멧의 이야기를 전한다. 손지윤은 빅 룸에서는 내전 현장을 담는 기자로, 스몰 룸에서는 어린 아이 키파, 두 가지 역할로 분한다.
"'룸 서울'에서 워낙 많은 에너지를 쓰니까, 연출과 프로듀서가 배려해주신 역할이에요.(웃음) 어떤 해석으로 연기를 하기보다, 기자의 경우는 영상이나 기사를 찾아보며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키파는 제가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같이 아파하면서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매번 마음이 아프고, 진심으로 연기하면 관객분들께 전달될 거라 생각해요."
지난 2015년, 해변에 엎드려 죽은 채 발견된 시리아 아기난민 사진으로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수년이 흘렀지만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기 사진이 엄청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시리아 내전에 대해 알아본 적은 있지만, 사실 깊게 알지는 못했죠.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관련 다큐나 정보를 많이 찾아봤어요. 참담하죠. 어떻게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안타깝고. 그래서 사실은 더 조심스러워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시리아 내전이 진행되고 있고, 무고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희생당하고 있고, 그들을 구하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적어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07년 연극 '해무'로 데뷔한 손지윤은, 학창시절 오락부장이었다가 친구들의 추천으로 지원했던 연극영화과에 덜컥 합격하면서 연극의 재미를 알게 됐다.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하면서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세월이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10년 전에는 10년 뒤에도 제가 연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칭찬해주고 싶어요.(웃음) 돌이켜보면 연기적으로 아쉬운 점도 많고 부끄러운 점도 많지만, 매 작품마다 후회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어요. 특히 작년은 재밌는 한 해였어요. 개인적으로 재연을 기다리는 편인데 두 편('수탁들의 싸움' '글로리아')이나 했고, 반려견도 생겼고요.(웃음) 재연은 초연보단 여유가 생기고 아쉬웠던 것들을 많이 해소할 수 있거든요. 재밌고 뿌듯한 2017년이었어요."
"재밌게 살자"는 것이 인생 모토인 배우 손지윤은 만족했던 작년처럼 올해 2018년도 즐겁게 보내고 싶다. 또 배우로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작품을 하든 못하든 무대에서 재밌게 하고 싶어요. 즐겁게 일하는 건 따라올 수가 없더라고요. 사실 올해 목표를 적어놓으면 너무 추상적이고 지키기 어렵잖아요. 하루하루 재밌게 살자고 아침마다 생각하기로 했어요.(웃음) 한결같이 열심히 하고 변하지 않는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연기적으로 믿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죠. 동료들에게는 계속 같이 작품을 하고 싶은 파트너였으면 좋겠고요."
마지막으로 손지윤은 연극 '더 헬멧'을 관람하는 팁으로 "하나만 봐도 좋지만, 네 편을 모두 다 봐야 저희가 얘기하고자 하는 큰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들이 다 합쳐지면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연극 '더 헬멧'은 오는 3월 4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된다.
[뉴스핌 Newspim] 글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