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양진영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배우 정선아가 쉽지 않은 도전을 했다. 전세계 라이선스 초연작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는 우아한 귀족 부인에서 죽음같은 사랑을 향해 달려나가는 불꽃같은 여인으로 안나를 빚어냈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지난 1월25일부터 공연 중이다. 세계적인 문학 거장 톨스토이의 고전 '안나 카레니나'가 웅장한 무대와 다이나믹한 군무, 화려하고 강렬한 스토리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정선아는 극의 타이틀롤 안나 역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힘있게 극을 장악한다.
"지난해에 '나폴레옹' 하면서 다른 작품을 준비할 여유가 사실 없었어요. 오디션을 보겠다 생각하기조차 어려웠어요. 하지만 포기하기엔 너무 작품도, 음악도 좋아서 고민을 하다가 정신없이 오디션을 봤죠. 그때 첫 러시아 연출님도 보고 음악을 부르고 연습했을 때 이전의 작품과는 차별화된 매력이 있었어요. 지금 '안나 카레니나'와 만난 게 상당히 큰 수확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러시아에서 온 '안나 카레니나'. 서울은 전에 없이 몰아친 혹한으로 '겨울왕국'이 돼 버렸지만 이 작품을 볼 때만큼은 오히려 가혹한 추위가 더욱 감흥을 돋워준다. 흩날리는 하얀 눈발과 아름다운 무대는 절로 감탄을 짓게 하고, 배경과 어우러지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한파를 녹여버릴 만큼 강렬하고 뜨겁게 느껴진다.
"배경이 정말 예쁘죠. 눈 내리는 것도 정말 아름답고, 날씨가 따뜻했으면 오히려 안어울렸을 작품이에요. 많은 분들이 책으로, 영화로 알고 계신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뮤지컬과는 다 표현 방식이 다르죠. 인간이 사는 건 다 똑같지만 그 안에서 안나가 선택하는 행복, 그녀의 행복과 불행, 사랑, 죽음까지 한 인간으로서 많은 면들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무대가 끝난 뒤에 뭔가를 느끼고 가지고 가신다면 그건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특히나 러시아에서 온 첫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가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특별할 이유는 충분했다. 정선아는 직접 뮤지컬을 준비하고 무대에서 연기하면서 러시아만의 매력에 푹 빠졌음을 털어놨다. 또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를 뚜렷이 드러내기보다 관객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게 그의 마음이었다.
"'안나'로 포스터 찍고 연습 들어갔을 때 러시아 방식이 특이하고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전혀 해보지 않았던 거지만 다행히 저한텐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너무 달라서 생소하기도 했죠. 그래도 연습밖에 없더라고요. 15년차가 된 지금 이 때에, 안나로 무대에 서서 지금까지완 다른 면을 보여드리려 했고, 다행히 즐겁다, 슬프다 이런 1차원적인 얘기보다 '그녀의 여정을 잘 보여줬다'고 말씀해주실 때 정말 뿌듯하고 기뻤어요."
남편과 아들이 있는 가정을 두고 열렬히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택하는 안나. 지금까지의 뮤지컬이나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다. 이해를 못하는 감정은 아닐테지만 충분히 낯선 여자로 무대에 오르며 정선아가 조금 달리 표현한 부분, 더 신경쓴 부분은 어떤 걸까.
"우리 나라와 달리 러시아 사람들은 더 뜨거운 느낌이에요. 다들 마음을 더 뜨겁게 뛰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물불 안가리고 스트레이트로 직진하는 성격이라고, '보드카처럼 뜨거워, 한 방이야'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눈보라'라는 넘버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갑자기 사랑에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나라도 점잖을 뺄 뿐이지 겉치레를 빼면 속은 똑같잖아요. 더 솔직하고 인간적으로 보이는 감정이죠. 맞고 틀리는 건 없어요. 당사자들의 선택이 있을 뿐이죠. 물론, 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랑에 그렇게 빠져들기를 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웃음)"
타이틀롤 안나로서 거의 공연 초반부터 끝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 정선아. 안나의 원맨쇼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배우 입장에선 온통 진을 빼놓는 뮤지컬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쉬면 감정이 끊어질 수도 있다. 안나로서는 감정의 그래프를 수월하게 그려나갈 수 있어 좋다"면서 웃었다. 마지막에 안나가 거의 정신이 나간 채로, 결국 죽음을 택하는 장면에서는 일명 '접신을 하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가장 힘든 건 역시 마지막 신이죠. 열차에 몸을 던지기까지 어떻게 보실 지 기대도 됐었고, 단순히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세 시간 안에 행복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까지 다 이해를 시켜야 하니 쉽지 않았죠. 다행히 너무 튀지 않게 집중할 수 있게 신들이 잘 연결돼 있긴 해요. 카타르시스를 주는 곡은 역시 '자유와 행복'이에요. 정선아가 꿈꾸는 것이기도 하고요. 사랑 그리고 삶, 그 말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가사가 간결하고, 반복이 굉장히 많은데 그 이유가 분명히 있죠. 강조할 것만 딱 해서 더 특별해요. 그게 러시아의 느낌이고, 안나, 카레닌, 브론스키와 더 잘 어울려요."
정선아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벌써 15년차, 무대에선 베테랑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든 '안나 카레니나'를 한치의 실수 없이, 감정적으로, 기술적으로 완성도있게 표현하는 것에서 이미 그 내공이 느껴진다. 그런 정선아에게 긴 시간 한 길을 걸어왔음에도 여전히 갈증이 있는 뭔가가 있을까.
"제가 얻은 게 있다면, 이제 동생들이 많이 생겼다는 거?(웃음) 18살에 시작했으니 주인공을 해도 항상 막내였거든요.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 자리에 와 있구나 싶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공연하면서 너무 사랑하면서 잘 왔구나 생각이 들어요. 조금의 갈증이 있다면, 더 인상깊은 드라마가 있는 작품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어요. 더 배우로서 유명해지거나 명예를 얻고 싶은 게 아니라 다양한 연기가 고프죠. 소극장에서도 연기해보고 싶고 관객과 숨쉬면서 울고 웃고. 그런 경험이 언젠가 오길 기다려요."
여러 차례 언급했듯, 정선아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옥주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뮤지컬 업게 톱클래스 배우다. 늘 뛰어난 뮤지컬 배우들을 만날 때면, 여느 팬들이 그렇듯 방송이나 영화, 다양한 매체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는 없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정선아는 "도전은 언제든 아름답다"는 말로 더 다양한 기회로 찾아올 것임을 조심스레 예고했다.
"전 도전은 언제든지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도전하면서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작품할 때 느끼는 여유가 거기서 오는 거죠. 그래서 늘 아름다운 도전을 하고 싶어요. 어딘가에 안주하지 않고 무엇이든, 어떤 작품이든 할 수 있죠. 제가 필요한 곳에서 항상 다른 느낌으로 빛나고 싶어요."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