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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의 수선전도] 내시가 만든 '광화문의 눈물'

기사입력 : 2020년08월20일 17:02

최종수정 : 2020년08월20일 18:21

내시 김사행이 설계·감독·감리..정도전은 큰 그림만
임진왜란·일제강점기 거치며 수차례 헐고 짓는 아픔
무분별한 광복절 집회로 코로나19 재확산 위기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광화문'이 울고 있다. 안정세로 가닥을 잡았던 듯 싶었던 신종코로나감염증(코로나19)이 광복절(8월15일) '광화문 집회'를 계기로 재확산 기로에 섰다.  

◆정문(正門)에서 세종 때 광화문(光化門)으로

조선건국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철저히 불탔다. 270여년의 세월을 상처입은 채 폐허로 지낸 광화문은 대원군의 중건으로 다시 기세를 펴는 듯 했지만, 일제 치하에 신음했다. 6·25전쟁을 겪으며 다시 파괴됐고, 몇 번의 재건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광화문은 현 시대에서 경복궁의 남문(南門)이 아닌 민주화의 요람으로 각인된다. 광화문 앞 넓게 트인 광장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한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사상 최초로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촛불집회를 비롯해 민주화의 고비마다 광화문은 자리를 내줬다.

광화문은 조선 건국 이후 법궁(法宮·왕조의 대표궁궐)이 된 경복궁의 담을 둘러싼 남쪽문이다. 처음부터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태조 4년(1395년) 10월7일 2번째 기사다. 태조가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왕의 침소)을 강녕전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작은 침실)을 연생전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이라 하고,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이라 하고, 동루를 융문루라 하고, 서루를 융무루라 하고, 전문을 근정문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광화문의 첫 이름은 바를 정(正)자를 쓴 '정문'이었다. 정도전은 이름을 지은 까닭도 태조 앞에서 밝힌다.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남쪽문)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신실하게 한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정문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종 때다. 세종 8년(1426년) 10월 26일.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 있었지만, 세종은 집현전에 명해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다시 정했다.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세 번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 동랑 협문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석교(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광화문은 양반들의 문이었다. 궁궐의 정문이라는 상징성이 있는데다, 좌우에는 조선의 관청들이 줄지어 있어 백성들이 감히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광화문은 조선의 표준시 역할도 했다. 광화문에 종과 북을 달아 임금의 거동을 알리고, 백성들에게도 일하고 마칠 시간을 알렸다.

'다락 3간이 상·하층으로 있었다.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태조 4년(1395년) 9월29일 경신 6번째 기사)

세종이 정문(正門)을 광화문으로 개명한 이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 남아 있지는 않다. 몇가지 설이 대두된다. 태평성대를 뜻하는 광청화일(光天化日)을 줄인 말이라는 설과 중국 고전 '서경'에 나오는 광피사표(光被四表)에서 따온 설이 유력하다.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데일리한국·2012년 2월23일)에 따르면 광피는 본래 빛이 넓게 미친다는 뜻이다. 임금의 덕이 널리 미치게 된다는 뜻도 가진다. 광(光)은 빛이라는 뜻 외에 '덕'(德)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즉, '광화=덕화'다. 중국 남북조시대 위수가 편찬한 '위서'(魏書·551~559) 함양왕희전에 덕화의 의미로 쓰인 '광화'가 나온다. 왕희는 왕에게 "폐하의 성스러움은 요순보다 더 뛰어나 중원을 광화하셨습니다(성과요순 광화중원·聖過堯舜 光化中原)"라고 대답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6년경 촬영된 광화문의 모습. <자료=문화재청> 2020.08.20 fair77@newspim.com

남쪽을 바라보는 광화문은 임금의 덕을 만방에 떨치는 덕화문이라는 해석이다. 남쪽은 정면이라는 의미와 같다. 경복궁에서 조선임금들은 '앞=남쪽'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정사를 펼쳤다. 남쪽 정문은 백성들을 향해 정사를 펼치는 문이었다. 따라서 광화문은 왕이 덕행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남쪽 정문이란 뜻을 담아 집현전 학사들이 이름을 지어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광화문은 임금이 백성들에게 직접 알리는 소통의 역할도 맡았다. '조선임금의 대자보'라는 말이다. 세종 11년(1429년) 2월 5일, 사헌부에서 건의한 금령의 조문을 요약해 광화문 밖 등지에 내걸었다. 조문은 모두 43개다. 주요 내용으로는 ▲관청의 조회가 끝날 때 옷을 터는 일 ▲남녀 불문하고 황색 옷을 입는 일 ▲양반 아닌 상인(常人)들이 성내에서 말을 타는 것을 금지했다. 중이 과부집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했는데, 당시 승려들이 과부집에 자주 드나들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음을 알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광화문 담벼락은 임금의 대자보가 아닌 '백성의 대자보'를 붙이는 공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중종 6년(1511년) 4월 17일 어떤 사람이 방문을 광화문 담장에 붙였다.

'김근사·성운·김굉·이빈은 오늘날의 사흉(네명의 흉악한 인물)이다. 근사는 폐주의 행신으로 폐주가 총애하던 기생을 첩으로 삼았으니,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운은 눈을 내려 뜨지 않고 조정을 경멸하며, 부정한 재물로 큰 집을 지었다. 김굉은 본래 그 집안에 음란한 기풍이 크게 행했으니, 두 기생을 첩으로 삼고 방종 음란을 마음대로 한다. 이빈은 상 중에 내를 막아 논을 풀었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중론이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김근사 등 4명은 중종반정 이후 옛 임금인 연산군의 신하들인데, 새로운 권력에 잘 타고 올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잘사니 나라 사람들이 비난한다는 내용을 대자보로 붙인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의 야경 모습. <자료=문화재청>2020.08.20 fair77@newspim.com

◆내시가 설계하고 지은 광화문

정도전이 광화문을 비롯한 경복궁 궁궐 배치 등 큰 그림을 그렸다면 실제 광화문을 설계한 인물은 김사행이다. 벼슬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다. 내시부의 으뜸 벼슬, 종2품이다. 즉, '환관 대장'이다.

환관이지만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다. 고려말 공민왕때부터 조선 태조까지 목숨을 이어가며 권세를 누리다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당시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린다.

고려사 세가 권제43(공민왕 21년-1372년-10월)에서는 김사행이 건축에 자질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양릉을 참배하고 길에서 놀이판을 벌이고 (공민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환관 김사행이 공사 감독을 잘하였으므로 안마(안장을 앉은 말)를 하사했다.'

비록 환관 신분이지만 건축에 보통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종의 입에서 '실제 경복궁 공사 설계와 감독은 김사행이 도맡았다'는 말이 나온다.

태종12년(1412년) 5월 14일. 형조에서 박자청이라는 신하가 이중위라는 인물에 대해 폭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이 대목에 김사행의 이름이 언급된다.

태종이 말한다. "태조 때에 있어 무릇 공역(工役)의 일을 환자(宦者·내시) 김사행이 맡았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사행이 권한 것이 아니고 도성을 창건하는 초기를 당하여 무릇 공역하는 것이 모두 신충(宸衷·임금의 마음, 즉 태조의 뜻)에서 나왔었다."

눈여겨 볼 대목은 김사행이 공역의 일, 즉 경복궁 창건의 일을 맡아 지휘 감독했다는 점을 태종이 직접 말한 것이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광화문도 김사행의 설계와 감리, 감독에 따라 이뤄졌다.

환관이지만 조선창업을 도와 태조에 의해 공신의 지위도 받는다. 태조 2년(1393년) 7월 27일 경오 1번째 기사다. 태조가 창업에 공이 있는 우인열·김사행·윤상·권중화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렸다.

'판내시부사 김사행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의 제도가 대강 마련되고 갖추어지지 못했는데, 전조(고려) 성시의 궁중 의식을 일일이 들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다.'

현재 몇차례 재건축과 보수가 되기는 했지만, 광화문의 웅장한 모습의 기초는 '조선의 내시'가 세운 셈이다. 하지만 김사행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은 김사행의 목을 베어 삼군부(조선초 군무를 관장하던 관청) 문에 매달게 했다.

고려와 조선을 넘나들며 광화문을 세운 환관은 역적으로 몰려 생을 마감했다. 김사행의 목이 매달린 삼군부는 조선초 육조거리 오른편 맨 앞(현재 정부서울청사 건물)에 위치했다. 자신이 세운 웅장한 광화문을 목이 잘린 채 바라본 애절한 인생이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제75주년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 국민운동본부·자유연대 주최로 문재인 퇴진 8.15 국민대회가 열린 가운데 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2020.08.15 mironj19@newspim.com

◆광화문의 눈물..집회자유에 걸맞는 책임 필요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로 남은 경복궁과 함께 광화문은 대원군의 중건까지 278년을 상처입은 채 쓸쓸히 자리를 지켰다.

일제 침탈기에는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건춘문 북쪽(현재 국립민속박물관자리)으로 해체 이전되면서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메이지 일왕 등을 기리는 일본의 신사)을 바라보기 위해 5도 가량 건물 각도까지 틀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6·25 전쟁 당시 포탄을 맞아 완파돼 목조 석루 부분은 사라졌고 석축만 남았다.

1968년 원래 위치로 이전한다고는 했지만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당시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춰 3.75도 가량 틀어졌다.

결국 광화문은 경복궁 복원사업 일환으로 2006년 철거돼 4년만인 2010년 완공되기는 했지만, 문 앞에 있던 월대(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는 교통체증을 이유로 복원이 미뤄져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광화문이 '집회의 자유 메카'로 자리매김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동안 집회의 성지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었다. 대한민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민주항쟁을 비롯해 한국사의 주요 고비에는 '시청앞 광장'이 있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대통령 탄핵 집회 등을 계기로 광화문 광장은 집회의 메카로 자리 잡는다.

집회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리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21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알릴 자유는 있다. 다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광복절에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집회는 법원도 허락한만큼 비난받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점을 고려한 배려가 있어야 했다.

광화문 집회로 코로나19가 재확산되고 있다. 그나마 기운을 차리는가 싶던 식당 등이 다시 침체기미가 뚜렷하고, 사회가 코로나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광화문 집회에서 광화문은 죄가 없다.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만 죄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재유행을 보면서 광화문이 흘리는 눈물과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fair77@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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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콕 집은 트럼프...축산농 반발 [세종=뉴스핌] 이정아 기자 = 다음 달 1일 한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25% 상호관세' 부과를 앞둔 상황에서 한미 간 막판 협상에 돌입했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철폐를 강하게 요구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 측의 압박으로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허용 등 농축산물 비관세장벽 카드를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다만 농민단체의 반발과 국민 신뢰가 흔들릴 것으로 예상되면서 '제2의 광우병 사태'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 美,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압박…韓, 농산물 카드 검토 28일 정부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호주가 미국산 소고기를 개방했다는 점을 연일 언급하며 한국에도 같은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호주가 미국산 소고기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며 "이제 우리는 호주에 (미국산) 소고기를 많이 팔 것"이라고 게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로이터 뉴스핌] 2025.07.25 mj72284@newspim.com 이어 "우리의 훌륭한 소고기를 거부하는 다른 나라들도 (개방) 요구를 받은 상태"라며 "이 좋은 흐름을 이어가자. 지금은 미국의 황금기"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고기 개방을 거부하는 국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관세협상을 앞둔 한국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브룩 롤린스 미국 농무부 장관 또한 트루스소셜을 통해 "지난 20년간 비과학적인 무역 장벽 때문에 우리 소고기가 호주 소비자들에게 판매되지 못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미국 농축산업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건강한 소고기를 생산하고 있다"며 "USTR은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타파하고 미국 국민이 주요 시장에 배제되지 않도록 미국의 무역 파트너들과 계속 협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협상을 진행하는 국가를 대상으로 연일 30개월 이상 소고기 개방을 압박하면서, 한국도 소고기 카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5일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협상 품목 아래 농산물도 포함돼 있다"며 "농업이나 디지털 분야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간 협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당초 정부는 한미 관세협상에서 농업분야 보호를 우선으로 두고,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개방 등 비관세 장벽을 해소할 카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바 있다. 한 대형마트의 미국산 쇠고기 진열대 모습 <뉴스핌 DB> 그러나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미 고위급 '2+2 통상협의'가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의 일정 사유로 전날 취소되면서 미국이 한국의 협상 태도에 불편을 느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앞서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해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오는 8월 1일부터 적용되며, 한미 양국은 관세 협상을 진행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 대해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용 ▲쌀 시장 추가 개방 ▲유전자변형(LMO) 감자·사과 검역 완화 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 농민단체 "관세협상에 농업 희생양 삼지 말아야"…대정부 투쟁 돌입 정부로서는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우선 한국은 현재도 미국산 소고기의 최대 수입국이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22억1000만달러로 집계됐다. 전체 수입액(38억4700만달러) 대비 57.4%를 차지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지난 2004년 1억300만달러에서 2012년 5억2200만달러, 2016년 10억3500만달러로 20억달러를 넘기다 2022년에는 26억2400만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까지의 연평균 증가율은 17.5%다. 이재명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우리나라는 이른바 '광우병 파동' 이후 30개월령 미만 미국산 소고기만 수입하고 있다. 지난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됐고, 우리 정부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까지 수입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당시 이명박 정부 지지율은 취임 2개월 만에 20%대로 폭락했고, 결국 정부는 미국과 소고기 협상을 일부 재협상했다. 다시 말해 현재 국내 소비자들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섭취에 대해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기반에 깔려 있다. 또 우리나라 연간 쌀 저율관세할당(TRQ) 물량은 40만8700톤으로, 미국 물량이 이중 13만2304톤(32%)을 차지한다. 쌀 개방은 WTO 규약에 묶여 있기 때문에 한미 양자 간 협상체계가 불가능하다. 다만 미국이 소고기 등 농산물 개방을 미루는 국가에 더 높은 관세를 부과할 계획이라는 점을 연일 강조하면서 국익 측면에서 조선·철강·반도체 등 산업을 보호하고 농산물을 희생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나온다. 농민단체는 정부의 기류에 대거 반발하고 있다. 한국농축산연합회, 한국종합농업단체협의회, 축산관련단체협의회, 농민의길 등 농축산업 단체는 이날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대정부 투쟁에 나선다. 이들 단체는 "미국산 농축산물은 이미 한미 FTA로 전면개방을 한 마당에 관세 추가 인하 및 비관세장벽까지 철폐된다면 농민 생존권 말살과 함께 국내 농업생산 기반 붕괴는 시간문제일 것"이라며 강하게 규탄한다. 이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수입연령 제한과 사과에 대한 식물검역은 국내법과 WTO 등 국제협정 등에 따른 정당한 조치이며, 국민건강과 직결된 것으로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문제"라며 "농축산물을 협상대상에서 제외해 식량주권과 국민건강권을 반드시 사수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단체 관계자는 "한미 관세협상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요구가 묵살될 경우 대대적인 추가 농민항쟁을 벌이겠다"고 예고했다. [서울=뉴스핌] 이형석 기자 =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쌀값정상화법 공포 촉구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04.03 leehs@newspim.com plum@newspim.com 2025-07-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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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 "8시간 넘는 야간근무 없앤다"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SPC그룹이 27일 대표이사 협의체인 'SPC 커미티'를 열고 장시간 야간 근로를 폐지하고, 앞으로 생산직의 야근 시간을 8시간 이내로 제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SPC그룹은 야간 생산이 불가피한 일부 필수 품목을 제외하고, 가능하면 야간 가동 자체를 줄여나가겠다는 방침이다. 그룹 관계자는 "8시간 초과 야근 폐지를 위해 △인력 확충 △생산 품목 및 생산량 조정 △라인 재편 등 전반적 생산 구조를 완전히 바꿀 계획이다. 각 (계열)사별 실행 방안을 마련해 10월1일부터 전면 시행한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5일 경기 시흥시 SPC 삼립 시흥 공장에서 열린 산업재해 근절 현장 노사간담회에서 발언을 하는 모습. [사진=대통령실]  주간 근무 시간 역시 단계적으로 단축해 장시간 노동에 따른 피로 누적과 사고 위험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이번 근무체계 전환이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노조와 협의를 병행하고, 내부 교육 및 매뉴얼 정비 작업도 함께 추진할 예정이다. SPC는 "생산 현장의 장시간 야간 근로에 대한 지적과 우려를 무겁게 받아들여 근무 형태를 비롯한 생산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근로자 안전이 최우선시되는 일터를 만들 수 있도록 적극 개선하고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지난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SPC삼립 시화공장을 직접 찾아 현장 간담회를 주재하며 야간 노동과 과도한 업무 강도를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월 SPC 시화공장에서 발생한 여성 노동자 사망 사고와 관련해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고 있다"며 "같은 방식의 사고가 반복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돈과 비용 때문에 안전과 생명을 희생하는 구조라면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며 "이번을 계기로 산재 사망률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김용범 정책실장, 문진영 사회수석 등 청와대 주요 인사들이 배석했으며, SPC 측에선 허영인 회장과 김범수 SPC삼립 대표, 김지형 컴플라이언스위원장, 김희성 안전보건총괄책임자, 김인혁 노조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CJ푸드빌, 크라운제과 등 타 식품업체의 현장 책임자들도 함께 자리를 했다. wonjc6@newspim.com 2025-07-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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