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사회 서울시

속보

더보기

[오승주의 수선전도] 내시가 만든 '광화문의 눈물'

기사입력 : 2020년08월20일 17:02

최종수정 : 2020년08월20일 18:21

내시 김사행이 설계·감독·감리..정도전은 큰 그림만
임진왜란·일제강점기 거치며 수차례 헐고 짓는 아픔
무분별한 광복절 집회로 코로나19 재확산 위기

[편집자] 수선전도(首善全圖)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목판본으로 인쇄한 지도입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도봉산부터 남쪽 한강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울의 주요 도로와 동네, 궁궐 등 460여개의 지명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수선전도에 있는 지명들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오승주의 수선전도'는 이 지도에 나온 동네의 발자취를 따라 지명과 동네에 담긴 역사성과 지리적 의미, 옛사람들의 삶과 숨결 등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 숨가쁜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계획입니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광화문'이 울고 있다. 안정세로 가닥을 잡았던 듯 싶었던 신종코로나감염증(코로나19)이 광복절(8월15일) '광화문 집회'를 계기로 재확산 기로에 섰다.  

◆정문(正門)에서 세종 때 광화문(光化門)으로

조선건국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철저히 불탔다. 270여년의 세월을 상처입은 채 폐허로 지낸 광화문은 대원군의 중건으로 다시 기세를 펴는 듯 했지만, 일제 치하에 신음했다. 6·25전쟁을 겪으며 다시 파괴됐고, 몇 번의 재건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광화문은 현 시대에서 경복궁의 남문(南門)이 아닌 민주화의 요람으로 각인된다. 광화문 앞 넓게 트인 광장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한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사상 최초로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촛불집회를 비롯해 민주화의 고비마다 광화문은 자리를 내줬다.

광화문은 조선 건국 이후 법궁(法宮·왕조의 대표궁궐)이 된 경복궁의 담을 둘러싼 남쪽문이다. 처음부터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태조 4년(1395년) 10월7일 2번째 기사다. 태조가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했다.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왕의 침소)을 강녕전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작은 침실)을 연생전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이라 하고,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이라 하고, 동루를 융문루라 하고, 서루를 융무루라 하고, 전문을 근정문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광화문의 첫 이름은 바를 정(正)자를 쓴 '정문'이었다. 정도전은 이름을 지은 까닭도 태조 앞에서 밝힌다.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남쪽문)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신실하게 한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정문이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세종 때다. 세종 8년(1426년) 10월 26일.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 있었지만, 세종은 집현전에 명해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다시 정했다.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세 번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 동랑 협문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석교(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광화문은 양반들의 문이었다. 궁궐의 정문이라는 상징성이 있는데다, 좌우에는 조선의 관청들이 줄지어 있어 백성들이 감히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광화문은 조선의 표준시 역할도 했다. 광화문에 종과 북을 달아 임금의 거동을 알리고, 백성들에게도 일하고 마칠 시간을 알렸다.

'다락 3간이 상·하층으로 있었다.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태조 4년(1395년) 9월29일 경신 6번째 기사)

세종이 정문(正門)을 광화문으로 개명한 이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 남아 있지는 않다. 몇가지 설이 대두된다. 태평성대를 뜻하는 광청화일(光天化日)을 줄인 말이라는 설과 중국 고전 '서경'에 나오는 광피사표(光被四表)에서 따온 설이 유력하다.

박대종의 어원 이야기(데일리한국·2012년 2월23일)에 따르면 광피는 본래 빛이 넓게 미친다는 뜻이다. 임금의 덕이 널리 미치게 된다는 뜻도 가진다. 광(光)은 빛이라는 뜻 외에 '덕'(德)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즉, '광화=덕화'다. 중국 남북조시대 위수가 편찬한 '위서'(魏書·551~559) 함양왕희전에 덕화의 의미로 쓰인 '광화'가 나온다. 왕희는 왕에게 "폐하의 성스러움은 요순보다 더 뛰어나 중원을 광화하셨습니다(성과요순 광화중원·聖過堯舜 光化中原)"라고 대답한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6년경 촬영된 광화문의 모습. <자료=문화재청> 2020.08.20 fair77@newspim.com

남쪽을 바라보는 광화문은 임금의 덕을 만방에 떨치는 덕화문이라는 해석이다. 남쪽은 정면이라는 의미와 같다. 경복궁에서 조선임금들은 '앞=남쪽'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정사를 펼쳤다. 남쪽 정문은 백성들을 향해 정사를 펼치는 문이었다. 따라서 광화문은 왕이 덕행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남쪽 정문이란 뜻을 담아 집현전 학사들이 이름을 지어 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광화문은 임금이 백성들에게 직접 알리는 소통의 역할도 맡았다. '조선임금의 대자보'라는 말이다. 세종 11년(1429년) 2월 5일, 사헌부에서 건의한 금령의 조문을 요약해 광화문 밖 등지에 내걸었다. 조문은 모두 43개다. 주요 내용으로는 ▲관청의 조회가 끝날 때 옷을 터는 일 ▲남녀 불문하고 황색 옷을 입는 일 ▲양반 아닌 상인(常人)들이 성내에서 말을 타는 것을 금지했다. 중이 과부집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했는데, 당시 승려들이 과부집에 자주 드나들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음을 알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광화문 담벼락은 임금의 대자보가 아닌 '백성의 대자보'를 붙이는 공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중종 6년(1511년) 4월 17일 어떤 사람이 방문을 광화문 담장에 붙였다.

'김근사·성운·김굉·이빈은 오늘날의 사흉(네명의 흉악한 인물)이다. 근사는 폐주의 행신으로 폐주가 총애하던 기생을 첩으로 삼았으니,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운은 눈을 내려 뜨지 않고 조정을 경멸하며, 부정한 재물로 큰 집을 지었다. 김굉은 본래 그 집안에 음란한 기풍이 크게 행했으니, 두 기생을 첩으로 삼고 방종 음란을 마음대로 한다. 이빈은 상 중에 내를 막아 논을 풀었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중론이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김근사 등 4명은 중종반정 이후 옛 임금인 연산군의 신하들인데, 새로운 권력에 잘 타고 올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잘사니 나라 사람들이 비난한다는 내용을 대자보로 붙인 것이다.

[서울=뉴스핌] 오승주 기자 = 서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의 야경 모습. <자료=문화재청>2020.08.20 fair77@newspim.com

◆내시가 설계하고 지은 광화문

정도전이 광화문을 비롯한 경복궁 궁궐 배치 등 큰 그림을 그렸다면 실제 광화문을 설계한 인물은 김사행이다. 벼슬이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다. 내시부의 으뜸 벼슬, 종2품이다. 즉, '환관 대장'이다.

환관이지만 건축에 일가견이 있었다. 고려말 공민왕때부터 조선 태조까지 목숨을 이어가며 권세를 누리다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당시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린다.

고려사 세가 권제43(공민왕 21년-1372년-10월)에서는 김사행이 건축에 자질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양릉을 참배하고 길에서 놀이판을 벌이고 (공민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환관 김사행이 공사 감독을 잘하였으므로 안마(안장을 앉은 말)를 하사했다.'

비록 환관 신분이지만 건축에 보통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태종의 입에서 '실제 경복궁 공사 설계와 감독은 김사행이 도맡았다'는 말이 나온다.

태종12년(1412년) 5월 14일. 형조에서 박자청이라는 신하가 이중위라는 인물에 대해 폭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이 대목에 김사행의 이름이 언급된다.

태종이 말한다. "태조 때에 있어 무릇 공역(工役)의 일을 환자(宦者·내시) 김사행이 맡았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사행이 권한 것이 아니고 도성을 창건하는 초기를 당하여 무릇 공역하는 것이 모두 신충(宸衷·임금의 마음, 즉 태조의 뜻)에서 나왔었다."

눈여겨 볼 대목은 김사행이 공역의 일, 즉 경복궁 창건의 일을 맡아 지휘 감독했다는 점을 태종이 직접 말한 것이다.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광화문도 김사행의 설계와 감리, 감독에 따라 이뤄졌다.

환관이지만 조선창업을 도와 태조에 의해 공신의 지위도 받는다. 태조 2년(1393년) 7월 27일 경오 1번째 기사다. 태조가 창업에 공이 있는 우인열·김사행·윤상·권중화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렸다.

'판내시부사 김사행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의 제도가 대강 마련되고 갖추어지지 못했는데, 전조(고려) 성시의 궁중 의식을 일일이 들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다.'

현재 몇차례 재건축과 보수가 되기는 했지만, 광화문의 웅장한 모습의 기초는 '조선의 내시'가 세운 셈이다. 하지만 김사행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 건축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은 김사행의 목을 베어 삼군부(조선초 군무를 관장하던 관청) 문에 매달게 했다.

고려와 조선을 넘나들며 광화문을 세운 환관은 역적으로 몰려 생을 마감했다. 김사행의 목이 매달린 삼군부는 조선초 육조거리 오른편 맨 앞(현재 정부서울청사 건물)에 위치했다. 자신이 세운 웅장한 광화문을 목이 잘린 채 바라본 애절한 인생이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제75주년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 국민운동본부·자유연대 주최로 문재인 퇴진 8.15 국민대회가 열린 가운데 집회 참가자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다. 2020.08.15 mironj19@newspim.com

◆광화문의 눈물..집회자유에 걸맞는 책임 필요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로 남은 경복궁과 함께 광화문은 대원군의 중건까지 278년을 상처입은 채 쓸쓸히 자리를 지켰다.

일제 침탈기에는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건춘문 북쪽(현재 국립민속박물관자리)으로 해체 이전되면서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메이지 일왕 등을 기리는 일본의 신사)을 바라보기 위해 5도 가량 건물 각도까지 틀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6·25 전쟁 당시 포탄을 맞아 완파돼 목조 석루 부분은 사라졌고 석축만 남았다.

1968년 원래 위치로 이전한다고는 했지만 고증을 거치지 않은 채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당시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에 맞춰 3.75도 가량 틀어졌다.

결국 광화문은 경복궁 복원사업 일환으로 2006년 철거돼 4년만인 2010년 완공되기는 했지만, 문 앞에 있던 월대(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는 교통체증을 이유로 복원이 미뤄져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광화문이 '집회의 자유 메카'로 자리매김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동안 집회의 성지는 서울시청 앞 광장이었다. 대한민국에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민주항쟁을 비롯해 한국사의 주요 고비에는 '시청앞 광장'이 있었다.

하지만 2016년 박근혜대통령 탄핵 집회 등을 계기로 광화문 광장은 집회의 메카로 자리 잡는다.

집회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리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21조 1항에서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알릴 자유는 있다. 다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광복절에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집회는 법원도 허락한만큼 비난받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점을 고려한 배려가 있어야 했다.

광화문 집회로 코로나19가 재확산되고 있다. 그나마 기운을 차리는가 싶던 식당 등이 다시 침체기미가 뚜렷하고, 사회가 코로나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광화문 집회에서 광화문은 죄가 없다.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만 죄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재유행을 보면서 광화문이 흘리는 눈물과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fair77@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김건희 문자 읽씹' 논란 한동훈 십자포화…전당대회 변수 될까 [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지낼 당시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문자를 무시했다는 '읽씹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 후보가 5일 "사적인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냈으나 당대표 후보들은 해명 및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한동훈(왼쪽부터)-윤상현-원희룡-나경원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가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약속, 공정 경선 서약식'에 참석해 있다. 2024.07.05 pangbin@newspim.com 김규완 CBS 논설실장은 전날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김 여사가 명품백 수수 문제로 당정이 갈등하던 1월 중순께 한 후보에게 '대국민 사과' 의향을 밝히는 문자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이 취재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했다며 공개한 문자에는 김 여사가 '제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부담을 드려 송구하다.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 실장은 "김 여사가 (한 후보로부터 답변을 못 받자) 굉장히 모욕을 느꼈고, 윤 대통령까지 크게 격노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 후보 캠프는 공식 입장을 통해 당시 문자를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CBS 라디오에서 방송한 '재구성'됐다는 문자 내용은 사실과 다름을 알려드린다"고 전했다. 한 후보 역시 5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문자) 내용이 조금 다르다"며 "집권당의 비상대책위원장과 영부인이 사적인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이어 "총선 기간 대통령실과 공적인 통로를 통해서 소통했고, 당시 국민 걱정을 덜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과가 필요하다는 의견 여러 차례 전달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대표 선거 경쟁자인 나경원·원희룡·윤상현 후보는 일제히 한 후보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나 후보는 이날 오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 후보가 상당히 정치적으로 미숙한 판단을 했다고 보고, 결국 총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를 독단적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이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고 왜 이런 판단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원 후보도 "영부인이 사과 이상의 조치도 당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하겠다는 것을 왜 독단적으로 뭉갰는지에 대해서 (한 후보의) 책임 있는 답변을 바라고 있다"며 "영부인의 사과 의사를 묵살하면서 결국 불리한 선거의 여건을 반전시키고 변곡점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놓침으로써, 선거를 망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 지적했다. 윤 후보 역시 페이스북에 "이런 신뢰관계로 어떻게 여당의 당대표직을 수행할 수 있겠냐"며 "검사장 시절에는 검찰총장의 부인이던 김건희 여사와 332차례 카카오톡을 주고받은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을 생각하면 다소 난데없는 태세전환"이라고 했다.  allpass@newspim.com 2024-07-05 17:10
사진
美민주당 거액 기부자들도 바이든 보이콧...디즈니家 "후원 중단"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TV토론에서 고령 리스크가 불거진 이래 대선 후보직 사퇴 압박을 받는 가운데 민주당 거액 기부자들도 '바이든 보이콧'에 나서는 분위기다. 4일(현지시간) CNBC 방송에 따르면 영화감독 및 기획자이자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공동 창업자 로이 O. 디즈니의 손녀 아비게일 디즈니는 이날 방송에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직에서 사퇴할 때까지 민주당에 후원금 기부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열린 첫 TV 대선 토론에서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고개를 숙인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2024.07.02 mj72284@newspim.com 그는 "나는 바이든 (후보직이) 대체될 때까지 당에 대한 모든 기부를 중단할 생각"이라며 "이것은 현실적인 선택이다. 바이든은 좋은 사람이고 국가를 훌륭하게 섬겼지만, 위험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바이든이 물러나지 않으면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며 "패배에 대한 결과는 진정으로 끔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비게일 디즈니는 오랜 민주당 후원자다. 미 연방선거위원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그는 4월 제인 폰다 기후 정치활동위원회(PAC)에 5만 달러(약 6890만 원)를 기부했고, 이 중 3만 5000달러가 오는 11월 상·하원 선거에 출마하는 민주당 의원들 선거 자금으로 유입됐다. 디즈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을 대체하는 데 흠이 없는 대안 후보라며 "우리는 훌륭한 부통령을 두고 있다. 민주당이 그를 중심으로 뭉칠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큰 격차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바이든 보이콧을 선언한 후원자는 디즈니뿐이 아니다. 기디언 스타인 모리아 펀드 회장도 계획했던 350만 달러 민주당 후원을 보류했으며, 실리콘밸리의 정신과 의사이자 자선사업가 칼라 저벳슨도 후원 일시 중단을 예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벳슨은 미국 민주당 후원 '큰 손' 50인 안에 드는 인물로 미 정치자금 감시 단체 오픈시크릿츠에 따르면 그가 올해 민주당에 기부한 금액은 500만 달러가 넘는다. 올해 선거 캠페인 기간에만 20만 달러를 바이든 캠프 모금 조직인 '바이든 빅토리 펀드'에 후원했다. 2020년에는 30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wonjc6@newspim.com  2024-07-05 10:11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