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이미지,상징,기도'전
불태운 청바지와 재로 작업한 '역사회화' 출품
다양한 신념체계 아우르며 존재의 의미 질문
[서울 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뉴욕과 방콕을 오가며 활동하는 태국 출신의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36)가 한국서 개인전을 갖는다. 비서구권 작가인 아룬나논차이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동양의 우주관과 서구적 예술미학, 애니미즘과 서양의 세계관을 유기적으로 변주하고, 혼합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라이징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지난해 전속계약을 체결한 서울 삼청로의 국제갤러리에서 작품전을 개막했다. 전시 타이틀은 '이미지, 상징, 기도'.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b.1986), 'Ecstasy on the mountain top, God is in the ground',2022. Oil paint and acrylic polymer on bleached denim on inkjet print on canvas, 218.4x162.6 cm,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2022.12.30 art29@newspim.com |
아룬나논차이는 영상, 퍼포먼스에서 회화, 설치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전 영역을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여러 형식을 파워풀하면서도 짜임새있게 엮어내며 작가는 개인과 사회, 삶과 죽음, 다양한 신념체계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지난 5년간 베니스비엔날레(2019), 휘트니비엔날레(2019), 이스탄불 비엔날레(2019), 광주비엔날레(2021) 등 13개의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한 그는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매년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을 선정하는 '파워 100'에서 8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You who wish to find prayers, look for it in the ashes' 2022. Metallic paint and acrylic polymer on bleached denim on inkjet print on canvas. 218.4x162.6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2022.12.30 art29@newspim.com |
아룬나논차이는 이번 전시에서 탄생과 소멸의 상징으로 불과 재를 내세웠다. 전시 개막일에 만난 작가는 "인류 문명은 불로 시작됐다. 불은 인간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불은 아이러니하게도 파괴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상징과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어 불을 활용했다. 또 불에 타고 난 재는 죽음을 의미하며, 그 자체로 시간을 초월하는 물성"이라고 했다. 결국 작가에게 불은 '과정(process)'으로서도, '주제(subject)'로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두 요소가 분리될 수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국제갤러리 K3관에 작가는 대표작인 '역사 회화' 연작 등 10점의 페인팅을 내걸었다. 붉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장면이 담긴 사진과 굵고 힘찬 붓질, 금속 호일에 의한 선, 장엄한 태양이 어우러진 회화는 아룬나논차이가 드러내고자 한 생명과 죽음, 안과 밖, 역사와 꿈이 강렬하게 교차하고 있다.
회화 연작이 걸린 전시장 바닥은 불타버린 검은 땅처럼 연출됐다. 재와 흙으로 다져진 잿빛 바닥에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 / 잠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몽 /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 / 우리는 외면당한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 격번 너머에 광휘 있고 / 통합에 대한 향수 / 애도의 땅에서 / 공기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당신을 맡긴다 /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서울 뉴스핌] 작가의 기도문이 새겨진 국제갤러리 K3 전시장 바닥. 관람객들은 재와 흙으로 다져진 검은 바닥을 밟으며 역사 회화를 감상하게 된다. [사진=이영란 기자] 2022.12.30 art29@newspim.com |
부조처럼 바닥에 새겨진 기도문 위에 작가는 '역사 회화'와 '빈 공간(하늘 회화)' 신작 10점을 걸었다. 2012년부터 선보인 '역사 회화'는 청바지(데님)를 주재료로 한 작업이다. 청바지를 표백한 뒤 그 위에 다층의 이미지를 쌓아올린 이 연작은 작가에게 '데님 페인터'라는 닉네임과 함께 오늘의 명성을 안긴 시그니처적 작업이다.
작가는 "청바지는 가장 미국적인 옷이고 서구의 아이덴티티와 결부된 옷이지만 지금은 전세계에서 가장 흔한 옷이다. 서구 위주의 글로벌화를 잘 보여주는 아이템인 동시에 노동의 오랜 역사도 담겨 있다"고 했다. 그는 청바지를 탈색해 이를 캔버스에 붙인 뒤 여러 이미지를 겹쳐 올린다. 자신의 신체를 각인하거나 텍스처를 옮긴 이 이미지들은 이후 불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작가는 이 회화에 불을 붙이는데 이 때 '불'이란 작업의 방식인 동시에 주제로 거듭난다. 형식과 내용이 교차하며 뒤섞이는 셈이다.
회화에 불을 붙인 후 작가는 문제의 불타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다. 불을 끈 뒤에는 불 타고 남은 회화의 파편과 그 잔재인 재, 불타는 과정을 기록한 사진을 결합한다. 결국 최종 결과인 작품은 스스로의 생성과정을 생생하게 품은 양상을 띠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아룬나논차이 회화의 유니크하고도 양가적인 측면이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뉴욕과 방콕을 오가며 활동하는 태국 출신의 아티스트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미국 등지에서 "이름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작가는 "내겐 당신들 이름이 어렵다"고 응수하며 한 때 이름과 관련된 작업도 펼쳤다. 그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 K3에서 2023년 1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이영란 기자] 2022.12.30 art29@newspim.com |
비서구권 작가로서 서구 사회에 편입돼 작업하는 그는 "나의 회화는 불을 통한 파괴과정을 거친 후 다시 이 것이 치유되고 재구성, 재탄생되는 프로세스를 거쳐 완성된다"며 "작품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선(line)이다. 작품 속 선들에는 실제 회화작업의 끝과 도큐멘테이션을 통해 기록이 시작되는 시점이 합쳐진다. 지금 존재로 현존하는 몸과 우리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몸을 끊김없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의 검은 바닥과 그 위에 걸린 독특한 회화들은 땅과 하늘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창조와 파멸의 우주적 순환구조를 은유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이미지와 상징을 찾기 위해 불 주변으로 모여들 때 땅과 하늘은 증인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는데 그것은 꿈의 형태로 탄생한다. 꿈은 역사 보다 훨씬 강력하고, 죽음도 피해간다"고 했다.
[서울 뉴스핌]이영란 기자=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개인전 '이미지, 상징, 기도'의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국제갤러리] 2022.12.30 art29@newspim.com |
태국 방콕에서 태어난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과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스톡홀름 현대미술관(2022), 서울 아트선재센터(2022), 쿤스트할 트론헤임(2021), 밀라노 스파치오 마이오키(2019), 헬싱키 키아스마 현대미술관(2017), 파리 팔레 드 도쿄(2015), 뉴욕 모마 PS1(2014)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뉴욕 휘트니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파리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난징 스팡현대미술관 등 세계 주요기관에 소장돼 있다. 작가는 '고스트(Ghost)'라는 이름의 방콕 기반 예술및 퍼포먼스 축제의 공동설립자로도 활동 중이다. 전시는 2023년 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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