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국가배상 책임 불인정→2심 "위자료 지급해야"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 불충분…끔찍한 피해 낳아"
피해자측 "국가 법적 책임 확인, 판결 수용해야"
[서울=뉴스핌] 이성화 기자 =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폐질환으로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은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9부(성지용 부장판사)는 6일 김모 씨 등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피고는 원고 3명에게 300~5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가습기살균제 사용자 및 피해자 찾기 예비사업' 결과보고 기자회견의 모습. [사진=뉴스핌DB] |
재판부는 "피고 소속 환경부 장관 등 공무원이 이 사건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에 대해 불충분하게 유해성 심사를 했음에도 그 결과를 성급히 반영해 일반적으로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고시한 다음 이를 10년 가까이 방치한 것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사회적 타당성이 없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해당 물질 자체의 독성 등 유해성이 일반적으로 충분히 심사·평가되거나 안전성이 검증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일반화해 공표했다"며 "마치 국가가 해당 물질 자체의 일반적인 유해성을 심사·평가해 안전성을 보장한 것과 같은 외관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PHMG·PGH가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수입·유통될 수 있었고 가습기살균제에 사용돼 지금과 같은 끔찍한 피해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국가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기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른 구제급여조정금을 지급받은 원고 2명에 대해서는 "피해보상이 충분히 이뤄졌다고 보인다"며 고유 위자료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머지 3명에 대해서는 구제급여조정금을 받지 않은 점과 피해전보의 필요성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산정했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을 대리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송기호 변호사는 이날 선고에 대해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최초로 확인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단순히 피해자들을 시혜적으로 돕는다든지 가해 기업으로부터 보상받는 것을 지원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할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법원이 확인했다"며 "1심부터 이미 10년이 걸린 판결인데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국가는 상고하지 말고 판결을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난 2014년 8월 국가와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세퓨·옥시레킷벤키저(옥시),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을 제조·납품한 한빛화학과 롯데쇼핑, 하청을 받아 자체브랜드(PB) 가습기 제품을 생산한 용마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옥시, 한빛화학, 롯데쇼핑, 용마산업과는 조정이 성립됐고 1심은 가습기살균제와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해 세퓨가 총 5억4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국가가 가습기살균제에 일부 화학물질이 사용된 것을 이를 미리 알았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국가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심 판결에 세퓨 측이 항소하지 않으면서 항소심에서는 국가배상 책임만 쟁점이 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달 25일 항소심 선고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심리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며 한 차례 선고를 연기했다.
shl22@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