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추억 아닌 '나아감'을 말하다
[서울=뉴스핌] 정태이 기자 =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멀어지는 속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서정적인 세계관이 실사라는 옷을 입고 스크린에 펼쳐졌다. 오는 25일 개봉하는 영화 '초속 5센티미터'는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로 다른 궤도를 도는 두 남녀 타카키와 아카리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흩날리는 벚꽃과 달, 그리고 타카키의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막을 올린다. 잦은 전학으로 이방인처럼 겉돌던 어린 시절 타카키와 아카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도서관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과 천문학 서적을 바꿔 읽으며 나눈 둘만의 대화는 견고한 성과도 같았다. 하지만 어린 날의 약속은 부모님의 전근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속절없이 흔들린다.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두 사람의 시간 차를 잔인하리만치 섬세하게 포착한다. 성인이 된 타카키의 시간은 멈춰있는 듯하다. 직장 동료 미즈노와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지만, 정작 그의 영혼은 그곳에 없다. "회사 내의 소통은 불필요한 내용뿐"이라 치부하며 습관처럼 휴대폰과 업무용 메신저에만 몰두한다. 미즈노가 "즐겁지 않은 것 같다"고 정곡을 찌른 순간 꺼진 모니터 화면에 비친 타카키의 공허한 얼굴은 마치 전원 끊긴 기계장치처럼 쓸쓸하다.
반면 아카리의 시간은 흐른다. 여전히 천문학을 좋아하고 서점 행사를 기획하며 바쁘게 살아간다. 동료가 "기억 때문에 운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과거에 발목 잡히기보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그의 모습은 타카키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감독은 이 엇갈린 시공간 곳곳에 '1991 EV', '초속 5센티미터', '0.0003%' 같은 상징적인 암호를 심어두었다. 특히 지구 멸망의 날을 암시하는 소행성 코드명 '1991 EV'는 역설적이게도 타카키가 30세가 되는 해이자,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을 가리킨다.
약속의 날 타카키는 이와후네역으로 향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타카키는 과학관 관장에게 씁쓸한 속내를 털어놓지만 관장은 이미 아카리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앞서 과학관을 찾았던 아카리가 "제 이름은 '빛(Light)'이라는 뜻인데 예전엔 그게 부끄럽고 제 자신이 어둡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카키를 만나 내가 밝아질 수 있었다"며 그 역시 과거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마음을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재회 대신 성장을 택한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속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에 그녀는 없지만, 타카키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빈자리를 확인하고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첫사랑이 남긴 진정한 의미가 '집착'이 아닌 '나아감'에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나 한 번쯤 가슴 속에 묻어둔 첫사랑이 있다. 살아가다 문득, 그 시절 나눴던 약속이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좋았던 옛 기억을 추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지만 아픈 과거의 기억은 가슴에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라는 이 영화의 조언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올봄, 다가올 벚꽃의 계절을 이 영화로 먼저 마주해 스크린 속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애틋한 사랑을 느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taeyi427@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