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좇아 '대못' 법안 발의...충분한 검토없이 날림 입법
[뉴스핌=고종민 기자] #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유출 사고 발생 시 해당 사업장 매출액의 최대 5%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한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유해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의 핵심 내용이다. 이 법안을 전후로 산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경영활동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정부는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이 화학물질 관리체계를 강화하고, 국민 안전과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유해화학물질 뿐 아니라 화학물질 전체로 감시의 눈을 넓히자는 취지로 법 개정을 준비했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 정책협의회를 통해 입법절차를 밟아났다.
하지만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법안에는 매출액의 50%를 과징금으로 물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 논의과정에서 10%로 조정됐고, 다시 5%까지 낮아진 것이다. 때마침 가습기 살균제 사건, 불산 누출 사고 등이 잇따라 터지자 관련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더욱 완화된 내용으로 화관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입법예고안이 발표됐다.
산업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박근혜 대통령이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는 경제학 경구를 들며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입법할 것을 주문한 결과다.
# 이낙연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말 대형마트나 기업형수퍼마켓(SSM) 등의 사업 확장으로 지역 소매점이나 중소 영세상인의 피해를 막기 위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대형마트나 기업형수퍼마켓(SSM) 등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상생 품목'으로 지정하면 이를 팔지 못하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만약 지자체에서 닭·계란·두부 등을 상생 품목으로 지정하면 대형마트는 해당 품목을 판매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 소매점이나 중소 영세상인의 피해를 막으려다 대형 마트에 해당 품목을 납품하는 농·축산민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법안이다.
# 밤 12시 이후 게임 접속을 차단하는 강제적 셧다운제, 학부모가 자녀의 게임 가능 시간을 지정할 수 있는 게임시간 선택제 등 게임 산업 입법 규제도 마찬가지다.
국회 및 게임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게임산업과 관련해 의원들이 발의안 인터넷게임중독 예방법(손인춘 새누리당 의원 발의)·게임중독법(신의진 새누리당 의원 발의) 등은 게임산업을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연간 3조원(2013년 기준) 가량의 수출을 기록하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산업인 게임을 단편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게임 업계 관계자는 "한국 게임 산업이 규제로 위축된 틈을 타 중국 자본이 국내 시장을 잠식해 게임 개발 주권이 무너질 수 있다"며 "블리자드 같은 글로벌 게임 기업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긍정적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논의가 국회에서 있었야한다"고 강조했다.
▲1월 1일 오전 제321회 국회 본회의가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113개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이 중 58%에 해당하는 65개 법안이 가결 당일을 전후해서 제안된 것이다.[사진=뉴시스] |
28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작년 12월31일과 올해 1월1일 사이에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113개 법률안 가운데 58%에 달하는 65개 법안이 가결 당일을 전후해서 제안됐다. 국회가 신중한 검토절차 없이 여야 간의 정치적 합의를 거쳐 손쉽게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소관 상임위원회 발의안이거나 여러 의원안을 종합한 대안이라고 정치권은 말하지만 각 당에 유리한 법안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통과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다 복잡한 내용을 담은 법안은 소관 상임위 의원들조차 세세하게 내용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도 어떻게 손써볼 수 없는 '국회발 규제 입법'들이 양산되고 있다.
한 여당 의원은 "본회의가 임박해 한꺼번에 수십 건의 법안이 올라오고, 심지어 최종안이 본회의 도중 넘어오기도 한다"며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법률 개정안이 올라와 의원들 대대수가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다른 의원도 "의원들 스스로 국민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모르고 법안을 제출하고, 심의하고 투표할 때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규제를 위한 법안은 좀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슈로 떠오르는 대형 사건이 있으면 국회의원들은 여론의 기류를 좇아 급조된 법안을 내놓는다. 사회적 관심이 높을 때 법안을 내놓아야 인지도를 높이고, 다음 선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가 발의하는 입법안은 관계부처협의와 당정협의를 거쳐 입법예고, 규제개혁위 심사,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심의 등의 절차를 거친다. 반면 의원 입법은 국회 법제실의 검토만 받으면 될 뿐 별도의 규제심사는 없다.
[뉴스핌 Newspim] 고종민 기자 (kjm@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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