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시나리오 유효, 남은 리스크는
[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장기간의 진통 끝에 그리스와 채권국이 3차 구제금융 개시 합의에 도달했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도 이번 협상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한 가지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은 그리스와 채권국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매직 플랜’은 없다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금융시장도 협상 결과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유럽과 미국 증시가 상승 화답했지만 유로화가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고 내림세로 돌아섰고, 독일 국채 수익률도 내림세를 나타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출처=블룸버그통신] |
이번 합의로 생사 기로에 섰던 그리스가 다시 한 번 생명줄을 잡았지만 승자는 없다는 것이 시장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리스가 지난 5일 국민투표에서 채권국의 구제금융 요건을 거부했을 때만 해도 민초들이 승리를 거둔 것으로 비쳐졌지만 상황은 다시 반전됐다.
대규모 자산 매각과 세금 인상, 정부 예산 축소 등 3차 구제금융을 개시하기 위한 요건은 국민투표 결과를 무의미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들을 배반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번 합의 도출이 그리스의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아내고 유로존 잔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급진좌파 정부의 공약을 사실상 깨뜨린 셈이라는 주장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출처=블룸버그통신] |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박수를 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번 합의안이 그리스 정부의 주체성을 정면 공격하는 ‘블랙메일’이라는 비난이 고개를 든 가운데 메르켈 총리와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에게 따가운 시선이 집중됐다.
스피로 소버린 스트래티지의 니콜라스 스피로 이사는 “이번 합의는 독일 주도의 경제적 쿠테타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유럽 싱크탱크인 유럽의 친구들(Friends of Europe)의 샤다 이슬람 정책 이사는 “채권국이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개시하는 데 합의를 이뤘지만 막대한 비용이 발생했다”며 “협상 과정에 메르켈 총리는 중립적인 이미지를 보이려고 애썼지만 쇼이블레 장관은 악당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국제정치경제연구소의 프레드릭 에릭슨 이사는 “채권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그리스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겠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라며 “그리스 부채위기 협상 과정에 확인된 것은 유로존이 구심점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 미국 투자매체 마켓워치는 메르켈 총리가 이번 협상 과정에 미국과 프랑스 등 주요 교역 상대국으로부터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 최악 시나리오 아직 유효하다
3차 구제금융 협상을 개시하기로 한 데 따라 그리스가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끈 것이 사실이지만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일부 투자자와 정책자들의 예상과 같이 시리자 정부가 내부적인 위기를 맞을 여지가 남아 있고, 통용 화폐를 도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지난 5일 국민투표 결과에 환호하는 그리스 국민[출처=블룸버그통신] |
더 나아가 그리스 외에 유럽 주요 정부 사이에 분열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Fx프로의 사이먼 스미스 이코노미스트는 “연초 이후 협상 과정에 이미 공동통화존에 커다란 흠집이 발생했다”며 “올해 하반기면 채무 조정 문제가 다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옥스포드 이코노믹스는 투자 보고서를 통해 “그렉시트 리스크가 진정됐지만 이번 합의 과정에 따른 장기적인 진통이 남을 것”이라며 “무엇보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 악화에 따른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미지근한 금융시장, 협상 vs 美 긴축 줄다리기
그리스의 3차 구제금융 기대에 유럽과 미국 주가가 랠리했다. 유럽 금융시장의 신용 리스크도 일정 부분 진정됐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전반적인 반응은 반쪽 짜리 축포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유로화의 약세다. 채권국과 그리스가 구제금융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상승 탄력을 받았던 유로화는 하락 반전했다.
이는 이른바 그렉시트 사태에 대한 경계감이 한풀 꺾이면서 투자자들의 시선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인상으로 이동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연준의 긴축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했으나 이번 합의로 금리인상 기대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이는 달러화에 대한 유로화 하락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US 뱅크 웰스 매니지먼트의 제니퍼 베일 채권 리서치 헤드는 “그리스 사태 해소는 곧 유로화 하락 압박으로 이어진다”며 “투자자들의 관심이 미국의 금리인상과 달러화 강세 추이로 옮겨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M&G 인베스트먼트의 짐 레비스 머니매니저는 “그렉시트 리스크가 해소된 만큼 연준이 9월이나 12월 금리인상을 단행할 여지가 높아졌다”며 “달러화가 유로화에 상승 탄력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작 그렉시트 리스크 진정에 따른 반사이익은 유로화보다 파운드화가 얻었다. 부채위기가 일정 부분 진화된 데 따라 영국 경제가 회복 속도를 높이는 한편 영란은행(BOE)의 금리인상 기대가 높아지면서 파운드화가 상승 모멘텀을 받은 것.
파운드화는 유로화에 대해 장중 1% 이상 뛰었고, 달러화에 대해서도 완만하게 상승했다.
한편 주가와 주변국 국채는 상승 흐름을 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각각 4bp 하락했고, 프랑스 증시가 2% 가까이 뛴 것을 포함해 유럽 주요 증시가 일제히 1% 내외로 상승했다.
미국 주요 주가지수도 1% 내외로 상승하며 그렉시트 리스크가 진정된 데 따른 안도감을 드러냈다. 투자자들은 당분간 금융시장에 ‘리스크-온’ 움직임이 우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뉴스핌 Newspim] 황숙혜 기자 (higrac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