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한때 그는 량차오웨이, 장첸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여리면서도 퇴폐적이고, 또 어딘가 아픔을 지닌 차가운 남자. 실제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썼고(비록 스크린 밖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김남길은 점차 그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외였고, 또 궁금했다. 재난 영화의 한 복판에 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자, 누군가의 친구가 된 시골 청년 김남길의 얼굴이.
배우 김남길(35)이 신작 ‘판도라’를 들고 극장가를 찾았다. 7일 개봉한 이 영화는 역대 최악의 강진에 원전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속에서 피해를 막기 위해 나선 평범한 사람들의 사투를 담았다. 김남길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이 무너진 재난 현장으로 돌아가는 재혁을 연기했다.
“만족해요. 사실 만들 땐 어떻게 구현될지 전혀 몰랐어요. 지진이 피부로 와 닿을 때도 아니었고 원전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죠. 근데 워낙 스토리도 좋고 재혁이 가진 정서적 표현들에 꽂혀서 꼭 해보고 싶었어요. 도시적이고 차가운 모습, 제가 했던 연기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날 만나면서 느꼈던 재혁과 비슷한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죠. 다만 그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던 거죠(웃음).”
힘들 줄 몰랐다는 그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김남길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적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 신은 특히 부담됐다. ‘네가 이걸 잘못하면 ‘판도라’는 시끄러운 재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스태프들의 우스갯소리에도 혼자 웃을 수가 없었다.
“살을 찌웠는데 배가 부르니 그 상황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그래서 이틀을 굶었는데 이제 몸이 붓더라고요(웃음). 에너지도 감정도 바닥났죠. 술도 마셔봤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죠. 폐소공포증도 오고 극도로 예민해졌어요. 몸이 터질 것 같았죠. 체력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밑바닥이라 더 할 자신도 없더라고요.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것도 자존심 상했어요. 그러다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주위에서 충분하니까 욕심부리지 말라고, 너 죽을 거 같다더라고요. 그래서 촬영장으로 돌아갔죠. 지금 내가 죽을 것 같다면 이걸 담자는 심정으로요(웃음).”
결국 고통을 이겨낸 건 작품을 향한 애정과 열정이었다. 실제 김남길은 촬영이 없는 날에도 매일 촬영장에 나갔다. 극중 가족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현장에 피난 상황을 계속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보고 균형을 맞춰야 하잖아요. 촬영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감정 따라 연기하기도 편했죠. 뭣보다 덜 심심하기도 하고요(웃음). 가서 감독님하고 캐치볼하고 축구하고 그랬죠. 촬영 끝나면 당구장 데리고 가서 당구 치고. 제가 이길 때까지 쳐야 하거든요. 그래서 새벽까지 매번 치고 다음 날 또 감독님한테 가서 놀자고 조르고. 나중엔 감독님이 제발 부탁이니까 촬영 없는 날엔 오지 말라더라고요. 하하.”
농을 섞어가며 자신의 공은 뒤로 감췄지만, 그는 생각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리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김남길은 여전히 자신의 연기에 박한 점수를 줬다. 앞서 기자간담회 때부터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들었느냐는 질문에 “오글거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빨리 개봉했으면 ‘좋아, 잘했어’ 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시간이 제법 지났잖아요. ‘판도라’ 찍고 두 작품이나 더 하면서 기다리던 상황이었죠. 그 사이 조금이라도 전 성숙했을 거고요. 그 아쉬운 지점들이 큰 화면으로 보니까 보이기 시작한 거죠. 사실 전 지금도 제 연기를 큰 화면으로 보면 오그라드는 게 있어요. 아, 개봉을 빨리해야 했어요. 아무도 모를 때 했어야죠(웃음).”
장난스레 울상을 짓던 김남길은 그래도 ‘판도라’ 속 자기 모습에 공감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당연히 연기가 좋아서는 아니고 시국과 맞물려서라는 단서가 뒤따랐다. 그 말이 맞다. 베일을 벗은 ‘판도라’는 떠들썩한 현 시국과 상당 부분 맞아떨어져 놀라움(?)을 자아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지진도 영화가 만들어지는 4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현실이 됐다.
“현 시국, 상황과 맞물려서 재혁의 대사 중에 와 닿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짠했죠. 그렇다고 개봉 시기가 좋다고만 할 수도 없어요. 시국이 이런 탓에 사회 고발 영화 혹은 정부를 깎아내리는 영화로 볼까 봐 덜어낸 부분도 많고요. 피로도도 분명 있을 거고, 또 지진이 실제로 일어나서 걱정스럽죠. 그래서 흥행은 많이 내려놨어요. 다만 우리 영화가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판도라’로 올해를 마무리할 김남길은 2017년 상반기 두 편의 영화로 다시 관객을 찾아올 계획이다. 천우희와 함께한 판타지 멜로 ‘어느 날’과 설경구, 설현과 호흡을 맞춘 범죄 스릴러 ‘살인자의 기억법’. 김남길은 두 작품을 통해 그전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요즘은 확실히 힘을 주는 게 덜해요. 표현하고 연기하는 데 있어 많이 내려놓고 편안하게 하려고요. 그러다 보니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되고 특정 이미지를 굳이 가지려고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옛날에는 조바심이 많이 났다면 이젠 많이 비워냈어요. 많이 심플해진 거죠.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계획도 많이 세웠는데 한결 편해졌어요. 아무 생각이 없어진 건가?(웃음)”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