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 부사령관 "北과 대화 시작"
"킹 볼모삼아 이득 극대화 노릴 것"
스파이 몰거나 억류 장기화 가능성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판문점을 통해 월북한 주한미군 병사 트레비스 킹(23)의 송환 문제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24일 대화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협상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킹 이등병의 안전한 귀환 못지않게 핵⋅미사일 도발과 이에 대응한 대북 군사압박으로 날카롭게 대치해온 북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통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다.
월북한 미군 트레비스 킹 이등병. [사진=로이터 뉴스핌] |
앤드루 해리슨 유엔군사령부(UNC) 부사령관은 이날 로이터통신에 "킹의 신병을 놓고 북한과 대화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해리슨 부사령관은 "대화는 휴전 협정 하에 가동된 장치를 통해 북한군 측과 이뤄졌다"고 말해 이른바 '핑크폰'으로 불리는 유엔사-북한 간 판문점 직통전화가 가동됐음을 알렸다.
올 들어 남북 간 통신선을 완전 차단한 채 대남 비방 수위를 높여온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채널을 열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한미 핵협의그룹(NCG)의 첫 개최와 미 해군 전략핵잠수함(SSBN) 켄터키함(SSN-737)에 이은 핵추진잠수함(SSN) 아나폴리스함(SSN-760)의 부산항 기항에 반발해 순항미사일 도발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북한이 미국의 전화에 수화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미군 이등병의 월북이라는 우발적 사태를 기회삼아 미국과의 대화채널을 구축하고 미군 송환뿐 아니라 향후 북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주한미군 이등병 트레비스 킹이 지난 18일 월북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T2, T3 건물 사이의 통로. 뒷편으로 북측 판문각이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
북한이 월북사태 일주일이 지난 24일까지도 관련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으면서 킹 이병에 대한 조사와 북미 직통전화를 통한 탐색전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대북 소식통은 뉴스핌에 "킹 이병이 월북 직후 북측 판문각과 통일각을 거쳐 개성을 경유하는 루트로 평양에 압송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북한은 지난 4월 말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NCG 가동과 SSBN 등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대북압박 강화조치가 이행단계에 접어들면서 상당한 압박감을 느껴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5월 말 군사정찰위성 발사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게 한미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6월 중순 노동당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마디 연설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지난 8일 김일성 사망 29주기를 맞아서는 김정은이 참배행사를 벌인 것으로 보도하면서도 사진 한 장 공개하지 못한 건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란 분석이다.
판문점 북측 지역과 유엔사를 연결하는 직통전화인 핑크폰. 전화기의 컬러를 따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사진=뉴스핌 자료사진] 2023.07.24 |
여기에 식량난 등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북한 체제가 외부의 압박 못지않게 내부로부터도 민심이반 등 체제균열의 위기를 겪게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특히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은 지난 17일자 담화에서 "최근 미국 측은 우리가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는 여론을 환기시키고 돌아가고 있다"며 북미 대화 문제를 거론해 워싱턴 측에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란 분석까지 제기된 바 있다.
공교롭게도 김여정의 담화 이튿날 킹 이병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를 관광하던 중 무단으로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월북하는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은 킹 이병을 볼모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 할 전략을 짜고 있을 것"이라며 "향후 북미 간의 협상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북한은 최근 대미 대립각을 세우면서 주민들에게 반미 선전⋅선동을 강화해 왔다.
6.25 전쟁 발발일로부터 7.27 정전협정 체결일까지를 '반미 월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북한이 올해의 경우 정전협정 70주를 내세워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25일 평양 5.1경기장에서 12만 명이 동원된 가운데 열린 '6.25 미제반대투쟁의 날 평양시 군중집회'에 등장한 미 본토 타격 선전화. [사진=조선중앙통신] |
기존의 패턴대로라면 북한은 킹 이병을 조사한 뒤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하고 거짓 진술을 강요해 미국을 비난하고, 종신형 등의 중형을 선고하는 방식으로 미국 측을 압박할 공산이 크다.
평양 관광에 나섰다가 북한 당국에 간첩혐의로 체포돼 2017년 6월 사망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악몽을 기억하는 미국 측은 킹 이병의 조기 석방을 위해 북한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국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킹 이병이 백주에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스파이 혐의를 적용하기 쉽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북한은 단순 석방보다는 미국의 태도를 보아가면서 억류 장기화 카드 등으로 압박할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yjlee@newspim.com